부활과 새벽이라는 말에는 생명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다. 또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박정희 대통령의 무자비한 독재정권 시절, 국회의원 제명을 당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무리 독재의 밤이 깊어도 자유의 새벽은 반드시 올 것임을 비유로 말한 것인데, 그 말을 한지 한달도 채 못돼 김재규의 총에 의해 독재의 밤은 거짓말처럼 막을 내렸다. 그렇다. 밤이 아무리 깊어도 새벽은 온다. 예전에 기도원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내려올 때면 사방이 정말 암흑처럼 캄캄했다. 그러나 잠시 후 동이 트기 시작할 때, 어둠이 도망치면서 산머리 위로 해가 떠올랐다. 새벽을 가져오는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잠시 황홀경에 빠지곤 했다. 부활이 죽음의 단계를 거쳐야 하듯 새벽 역시 어둠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6일에 아담을 만드셨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했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삶을 살았던 아담에게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타락한 그날 밤, 아담의 마음은 범죄 전과는 달랐을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했을 것이다. 범죄 후 맞이한 캄캄한 밤은 이전의 밤과는 달랐다. 하나님을 떠난 아담은 불안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또 한편으로는 회개하는 심정으로 온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그러다 드디어 동쪽에서 캄캄한 어둠을 몰아내는 해가 떠올랐을 때, 아담의 입에서는 “새벽이다” 하는 소리와 함께 감격의 눈물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아담이 죄의 밤을 고통스럽게 보낸 후 맞이한 첫 새벽의 그 심정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죄로 인해 눈물로 어둠의 밤을 지새워본 사람들이라면 그 새벽 아담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 죄로 인해 통곡해 본 사람은 밝아오는 새벽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구원의 감격을 새롭게 느낄 수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애가 3장 22절, 2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어둠의 권세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도 비례해서 크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세상에 임한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다. 3년간의 공생애 후,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벽을 가져오는 희생의 제물이 되셨다. 그렇게 부활의 새벽, 구원의 새아침은 시작되었다. 부활을 통해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은 끝이 나고, 빛을 가져오는 새벽이 도래하였던 것이다. 부활의 첫새벽은 이전의 새벽과는 다른 날이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어둠에 마침표를 찍으신 날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뷔르낭(Burnand, Eugene; 1850-1921)이 그린 「부활의 새벽」이라는 유명한 작품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부활의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이 힘차게 달려가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그들의 모습을 통해 어둠이 막을 내리는 부활의 새벽이 생동감 있게 나타난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새벽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주님은 부활을 통해 그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