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과 예성의 통합에 대한 찬반이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양 교단의 신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기성과 예성의 입장에서 성결교단 분열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교단 통합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성결교회역사연구소는 4일 오전 10시 서울신대 우석기념관에서 ‘한국성결교회의 분열과 회복’이라는 주제로 양 교단의 신학자인 허명섭 교수(기성·서울신대)와 배본철 교수(예성·성결대)를 초청해 제11회 영익기념강좌를 개최했다. 또, 논찬자로 기성측에 박창훈 목사(온양교회), 예성측에 강명구 교수(성결대 외래교수)가 참석했다. 교단 분열 후 분열과 회복이라는 주제로 양 교단의 신학자들이 모여 강좌를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기성측 입장에서 분열과 회복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허명섭 교수(서울신대)ⓒ박종배 기자

허명섭 교수, 교단 통합 당위성은 “동일한 정체성”에서= 먼저 허명섭 교수가 기성측 입장에서 바라본 성결교단 분열의 역사를 되짚었다. 그는 성결교단 분열 요인에 NCC 노선과 NAE 노선의 갈등뿐만 아니라 사회사업문제에 따른 성결교단의 정체성도 맞물려 있었음을 주장했다. 창립 초기부터 직접전도를 본질적 사명으로 인식해 온 성결교단이 해방 후 사회사업과 같은 간접전도에 힘쓰면서 정체성이 흐려졌고, 반작용으로 갈등과 분열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허 교수는 “성결교단은 NCC 및 NAE의 동시 탈퇴문제로 갈등하다가 분열됐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정체성에 대한 갈등 또한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며 “성결교단이 초기부터 본질적 사명으로 인식해 왔던 직접전도를 강조하는 노선과 해방 이후 새롭게 대두된 간접전도 또한 중시하려는 노선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분열 이후 양 교단은 성결교단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는 점을 들어 통합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는 “양 교단은 지금까지 성결교단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기울여 왔다”며 “이런 점에 집중한다면 통합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런 의미에서 양 교단 원로들의 지혜와 적극적인 지원이 요청된다”며 “두 차례의 통합 과정에서 하나 됨의 현장에 있었던 역사적 증인들이 나서 준다면 더욱 유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예성측 입장에서 분열과 회복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배본철 교수(성결대)ⓒ박종배 기자

배본철 교수 “기성은 예성의 아픔 알아야”= 반면, 예성측 입장에서 발제한 배본철 교수는 “당시 교단 분열은 WCC와 같은 진보주의적 신학 노선을 거부하는 최종적 결단이었다”며 예성이 분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 중점을 뒀다.

또, 그는 1965년과 1973년 있었던 두 차례의 통합 과정에서 예성이 겪었던 상처들을 설명하면서 “급진적 통합은 자제하고 신중하게 통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배 교수는 △구체적이고 안전한 교단 통합의 원칙을 세우는 일 △양 교단의 대립된 역사 해석의 조화점을 찾기 위해 연구하는 일 △예성측의 정서적 손실감을 회복하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일에 양 교단이 노력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논찬자로 나선 박창훈 목사는 “최근 통합 논의가 다소 급진적으로 이뤄진 것은 사실이며 배 교수의 신중통합론 또한 이해된다. 그러나 통합을 위한 ‘장기적으로 확실한 대안’을 예성측에서 제안하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배 교수는 “예성측의 적극적인 행보를 지적하는 것은 타당한 말”이라며 “이같은 제안이 예성측에 설득력 있게 전달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배 교수는 “예성의 분열은 진보주의적 노선을 거부하는 최종적 결단이었다고 하지만 이는 표면적 이유이고, 모든 분열 뒤에는 이권이 걸려 있듯이 기성과 예성의 분열 역사 속에서도 리더십과 금전적 문제가 있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는 “그렇기 때문에 교단 통합은 ‘1세대가 지난 다음에야 이뤄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예성 내 젊은 목회자들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날 세미나에 참석한 예사목(예성을 사랑하는 목회자 모임) 박찬희 목사 또한 “예사목의 입장은 통합에 찬성하는 쪽”이라며 “다만 원로 목사님들이 주저하고 있기 때문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또 “급진적 통합이 아닌 배 교수의 신중통합론에 찬성한다”고 덧붙였다.

▲4일 오전 10시 서울신대 우석기념관에서 한국성결교회의 분열과 회복이라는 주제로 제11회 영익기념강좌가 열렸다. 왼쪽부터 박명수 교수(사회자), 허명섭 교수(서울신대), 강명구 교수(성결대 외래교수), 배본철 교수(성결대), 박창훈 목사(온양교회)가 배석했다. ⓒ박종배 기자

NCC와 NAE 갈등에서부터 시작된 기성과 예성의 분열의 역사

기성과 예성의 분열 역사는 1950년 후반 한국 교계의 대표적인 연합기구였던 NCC와 NAE의 갈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NCC(National Christian Council)와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gelicals)는 교파연합단체와 신앙동지들의 모임이라는 이름 하에 복음주의적 색채를 띠며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NCC와 NAE의 갈등은 1950년대 중반 NCC가 자유주의와 용공(容共)단체로 비판받던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와 교류를 갖게 되면서 일어났다. WCC와 교류하기 시작한 초기엔 복음주의적 색채를 잃지 않고 있었던 NCC였다. 하지만 1956년 NCC는 기장을 회원 교단으로 가입시키면서 신학적 문제를 표출, NAE의 극심한 비난을 샀다. 이후 NCC는 점차 진보적으로 변해 갔고, NAE 또한 정치 세력화 되면서 양 기구의 갈등은 심화돼 갔다.

양 기구에 동시 가입돼 있었던 성결교단에서는 ‘NCC와 NAE의 동시 탈퇴’ 여론이 일었고, 이때부터 교단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결교단은 ‘동시 탈퇴하자’는 쪽과 ‘탈퇴 보류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양분됐다. 탈퇴에 대한 찬반 여론이 있던 가운데 1960년 5월 20일 속회를 연 성결교단은 이를 투표에 붙였고, 40대 43의 근소한 차이로 ‘NCC와 NAE 탈퇴를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듬해 NCC와 NAE의 동시 탈퇴를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못 박자, 일부 대의원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에 이명직, 황성택, 김응조, 이성봉 목사 등은 ‘복음진리수호동지회’라는 조직을 구성해 지속적으로 양 기구 탈퇴를 총회에 요구했다. “성결교단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요구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1961년 5월 30일 서울 독립문교회에서 김홍순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함으로써 보수총회(現 예성총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1962년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중앙교회에서 열린 제17회 총회에서 ‘기독교대한성결교회’라는 교단 이름을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변경했다.

분립 이후 기성과 예성은 1965년과 1973년 두 차례에 걸쳐 통합을 시도했다. 하지만 예성 내 일부 교회만 기성으로 편입하는 반쪽짜리 통합이었다. 예성 내 통합 반대 세력은 완강하게 통합을 거부했고, 이 때문에 완전한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이후 30여 년이 지나 성결교단 창립 1백주년을 맞은 2007년, 기성과 예성이 통합될 수 있을지 초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