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 맘 때에 한국에 있는 제자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나름 예쁘게 살고 있는 가정이었는데 뜻밖이었습니다. “목사님, 저희... 이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냥 생각나실 때 기도해 주세요.” 이런 얘기를 듣고 어떻게 생각날 때 기도만 할 수 있을까? 몇 번의 장거리 전화와 십 수번의 메일 그리고 그 친구 주변에 살고 있는 친구들을 총동원하여 일단 급한 불을 껐던 적이 있습니다. 그 가정을 위해서 긴급 중보기도를 부탁하자, 처음엔 다들 이해 못하는 반응이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너무 행복한 가정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근간에 미국에서 목회하는 아끼는 후배목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형님, 아무래도 목회지를 옮겨야 할 것 같아요.” 처음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듣다가 상황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사람이 너무 힘들어 하네요. 도저히 더 이상 못 있겠데요.” 사모님이 힘들어한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나는 앞 뒤 없이 다구쳤습니다. “야, 너 뭔 일 있었냐? 도데체 무슨 일이야?” 사모님을 만났을 때의 인상이 워낙 밝고 긍정적이었기에 제가 오히려 흥분하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삼류소설 차원의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더 깊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잠시 들려 집회를 하면서 귀를 의심할 정도의 별로 듣고 싶은 않은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정의 깨어짐에 대한 빠른 확산과 그러나 이에 대한 그다지 놀라지 않는 반응이었습니다. 안으론 큰 홍역을 앓고 있었지만, 그저 마마자국 정도 생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는 일반 성도들만이 아니라, 이름만 대도 아는 이른바 유명 목회자들의 가정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도 계속 되새겨져 잠까지 설치게 하였지만, 정말 문제는 이같은 사실들이 이제는 별로 충격도, 이상하지도 않게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태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정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있음입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가져야 할 깊은 인식은 가정에 대한 소중함과 동시에 붕괴의 결과에 대한 비참함입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이같은 아픔의 현실에 대해 자유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느 누가 “나는, 우리 가정은 문제 없어. 나는 만족하고 행복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부서지 쉬운 약하디 약한 흙으로 만들어진, 게다가 죄성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못난 자아를 가진 두 사람이 만났는데, 어떻게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을까요?

엊그제, 결혼을 앞둔 커플과 카운셀링을 하면서 나눈 말씀은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 이후에 받은 벌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근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이 땅에 창조된 가장 처음의 공동체는 바로 가정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도 아닙니다. 물론 학교도, 병원도, 어떤 공동체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가정을 가장 먼저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의미는 생각이상으로 절대적이며, 분명합니다. 그것은 가정만이 모든 것의 시작이며, 동시에 모든 것의 마지막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정이 모든 것의 기준입니다.

그 가정을 구성하는 가장 처음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은 바로 남편과 아내,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는 그 둘 사이에 문제가 생겼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금하셨던 선을 구별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입니다. 겉으론 공모로 보이지만, 아내인 하와의 역할이 컸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정말 남편은 아내 하기 나름입니다. 그로인해 남편된 아담은 종신토록 수고하여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게 되는 벌을 받게 되고, 아내된 하와는 해산하는 고통과 더불어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리게 되는”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가 받은 두 번째 벌이 좀 수상합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6/개역)인데 무슨 벌이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고 그 댓가로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는 것일까? 사실 ‘사모’로 변역된 원어는 욕망쪽에 가까운 ‘욕심’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도 desire입니다. 그래서 새번역에는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NIV는 “Your desire will be for your husband, and he will rule over you." 이제야 무슨 말인지 보입니다. 그리고 이게 얼마나 무서운 벌인지 깨닫습니다.

즉, 하나님이 하와에게 준 벌은 “너는 너의 욕망으로 남편을 대할 것이며, 그 결과 남편은 너를 통치할 것입니다.”입니다. 결혼생활의 비극은 자기의 욕망으로 배우자를 대할 때입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남편을 존경해야 할 아내가 남편을 자신의 욕망의 성취 대상으로 여기거나, 남편을 향한 주도권을 잡는 욕심이 생기는 것이 바로 아내에게 임한 벌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아내가 그렇게 하니,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제하고 다스리는 폭력의 관계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하는 것, 비극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20 말씀이 필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말씀의 비밀을 깨달은 남편과 아내는 선악과의 저주로 부터 나와 진정한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김성묵장로님의 가정세미나를 통해 귀한 비밀을 깨닫게 되기기를 기도드립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여러분께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