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재물”에 대하여 말하기도 하지만, “가난”에 대하여도 말합니다. 성경은 “부는 좋고 가난은 나쁘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시는 복으로서의 부가 있는가 하면, 착취와 도적질로 말미암은 부가 있음을 말합니다. 아울러 가난도 게으름과 타락으로 말미암은 가난이 있을 수 있지만, 영적으로 깊은 유익을 끼치는 가난이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난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을 잘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은 영적인 유익을 위한 가난, 즉 영적인 추구를 위하여 재물을 얻기를 절제하는 것을 나쁘다 여기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분은 세례요한이나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기 위하여 물질을 생산하는 일을 절제하였으며, 복음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천막을 지으면서 복음전도자가 되었던 “자발적인 가난”을 택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가난은 구조적인 부정의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정의로운 삶에 대한 인식을 가지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일년에 3번이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글라데시에 가난이 만연하고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에콰돌에 석유를 파서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총액의 75퍼센트가 미국의 석유개발업자에게로 돌아가고 다만 3퍼센트 이하의 돈이 일반의 국민에게로 돌아간다는 것, 석유개발 이전보다 더욱 실업이 늘어난 것은 구조적인 부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세계에 널리 퍼진 가난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기회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가난한 민중의 힘을 모아 경제적 정치적 혁명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고 병을 고쳐주며, 그들을 이끌어 하늘의 백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메시야의 표지이자 하나님의 나라의 임하심이었습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가 복이 있다”(시 41:1)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이 복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지금과 같이 괴로운 시절에는 더구나 하나님의 고통 받는 자녀들을 심방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4가지 복이 있으리라고 단언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의 복이 있다고 하시듯이,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가 재앙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며, 땅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시고, 병을 고쳐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