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의미의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많은 고난과 역경을 잘 참고 견딘 후 그에 걸맞은 보상이 따라 올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범죄한 우리 인간들을 구속하기 위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십자가 고통과 죽음을 당하시고, 장사된지 사흘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다. 그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하셨다. 이같은 고난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으니 우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십자가 없이는 영광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이같은 관점은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에도 무의식적으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각각 성격이 다른 단속적인 사건인 것처럼 생각한다. 이럴 경우 십자가 고통에 대한 심적 경험이 강하면 강할수록 부활의 영광은 더 크고 찬란하게 다가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 성도들은 일반적으로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비록 간접적이긴 하지만 더 깊이 있게 경험하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고난주간에는 가능한 한 오락을 삼가고, 때로는 금식하면서 주님의 십자가 고통에 동참하고자 한다. 특별히 금요일 정사예배를 드릴 때는 정말 우리를 위해 당하신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느껴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금요일이 지나고 토요일이 되면 이미 주님은 무덤 속에 계신다는 사실에 우리의 마음은 좀더 편안함을 느끼게 되며, 주일 새벽 미명부터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부활을 기쁨으로 축하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과는 단절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은 결코 분리된 단속적 사건이 아니다. 고난은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할 수 없이 당하신 것이 아니고 부활은 이제 할 일을 다하셨다고 만세를 부르시면서 스스로 일어나신 사건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은 연속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예수님의 고난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건이었다. 예수님의 부활 역시 혼자 마음대로 사망에서 일어나신 사건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에서 일으켜주시고 아들이신 예수님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해 일어난 사건이다. 예수님의 고난도 철저하게 우리를 위한 사건이며 부활도 철저하게 우리를 위한 사건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맞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가 더욱 분명해 진다. 고난주간에는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고, 부활주일에는 십자가의 승리를 찬양한 후,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는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단속적 삶을 청산해야 한다. 기독교의 세력을 과시하면서 부활절 행사를 어떻게 규모있게 거행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부활절 연합예배의 설교를 누가 하며, 순서를 어떻게 배정하느냐도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의 역사적 부활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신앙은 결국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 운동으로 연결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