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에서 두 밤을 자면서 밤마다 눈물이 났습니다. 북한의 상황이 너무도 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연변의 과학기술대학을 방문하면서 금방 북한에서 돌아온 분들의 소식을 듣는 순간에도, 두 시간 떨어진 무산시(茂山市)에 가서 직접 도시의 경관을 돌아본 후에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교회의 내년 사역지로 정하여 기도하는 북한이 너무도 어려운 상황에 있다는 사실과 그 북한의 사정이 금방 변화되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두만강은 창백해 보였습니다. 한 맺힌 두만강은 민족의 애환을 안은 채 슬프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강을 넘어서 수많은 탈북자들이 고국을 등졌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족에게 몸을 팔려 나간 수많은 우리의 누이동생이 있었으며, 굶어 죽지 않기 위하여 불안하게 국경을 넘은 사람이 이제 수십만이 되었습니다. 장군님의 “천국”을 등진 사람들 중에서 이제 23,000명의 사람들이 그토록 비난했던 “지옥” 대한민국으로 망명을 하였습니다.

연변에서 일송정을 지나 두만강 가에 펼쳐진 무산을 보는 것은 잿빛 우울함 그 자체였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무산시의 장엄한 경관이 우리를 압도시킬 만도 한데, 두 눈에 꽉 찬 잿빛 시가지는 단조로운 집과 가지런한 굴뚝들, 그리고 포장되지 않은 시가지와 차량한 대 다니지 않는 질박함이 나를 슬프게 했습니다. 온통 파헤쳐진 높은 노천 철광에는 쉴 사이 없이 중국트럭이 다니고 있었고, 50년 채굴권을 팔아버린 북한의 가난이 분노를 자아낼 뿐이었습니다. 농사를 산비탈에 짖겠다고 다 파놓은 산자락 밭은 국토를 누더기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아서 슬펐습니다. 이것이 두만강의 마지막 사연이라면 너무도 슬픈 노릇입니다.

복음은 민족 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임을 저는 믿습니다. 복음은 개인을 변화시키면서 공동체를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교회를 변화시킬 뿐 만 아니라 결국은 사회를 새롭게 합니다. 복음을 버리는 것과 복음을 가슴에 품는 것이 어느 것이 유익한지는 남과 북의 지난 60여년의 역사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용과 신뢰가 사라져 버린 사회, 거짓과 증오가 가득 찬 사회, 평등을 노래하면서 인간의 차별과 인권의 취약성이 극에 달한 사회, 그리고 온갖 신화와 속임수가 난무한 사회가 어디 입니까?

기도는 신음이 됩니다. 간구는 부르짖음이 됩니다. 그 척박한 사회를 소망으로 두르기 위하여, 그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기 위하여 우리는 “천국”을 떠나 남으로 온 사람을 복음으로 섬기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