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성이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다. 예수님의 직함을 말해 주는 공식적인 호칭이다. 이 호칭은 “예수”라는 이름 앞에, 혹은 뒤에 나타나는 데, 그것은 마치 박사 아무개, 혹은 아무개 박사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이다. “그리스도”의 한국어 번역은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 히브리어 번역은 “메시야”이다. “메시야”나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말뜻을 따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소리나는 대로 음역한 것이다. “그리스도,” “메시야,” “기름부음 받은 자”는 다 같은 말이다.

구약 성경에는 기름부음을 받아 세움을 입는 직분이 세 가지 나온다.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다. 이 세 직분은 아브라함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웠던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여 나타난다.

물론 이스라엘에 왕과 제사장이 세워지기 전부터 주변 국가들에 왕과 제사장들이 있었다. 성경에 처음으로 “왕,” “제사장”이라는 말이 나오는 곳은 창세기 14장이다. 소돔 왕들 사이의 전쟁으로 롯이 납치되어 갔을 때 아브라함이 그의 가신들을 데리고 가서 그의 조카 롯과 가족들, 약탈 당했던 모든 재물을 다시 찾아 오다가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십일조를 드렸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왕들이나 제사장이 기름부음을 받아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되게 세워진 직분이었는지에 대하여는 확언 할 수 없다.

아브라함을 불러 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기름부어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을 구별하여 세우게 된 것은 모세 이 후의 일이다. 모세가 아론에게 기름부어 제사장이 되게 하였고 (출애굽기 30장 30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부어 왕이 되게 했다 (사무엘상 15장 1절). 선지자가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로 세운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엘리사를 기름을 부어 자신을 계승할 선지자로 세우라고 명령하신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다 (열왕기상 19장 16절).

예수님을 메시야, 그리스도, 또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왕, 선지자,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왕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통치자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일 뿐만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만민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어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이라고 하는 새 이름을 주신 것이나,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출애굽기 19장 6절) 삼으시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나라들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시다 (요한계시록 19장 16절).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던 사람이다. 구약시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음성으로 듣거나 환상, 혹은 꿈을 통하여 보고, 받은 바 그 계시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 이 계시의 말씀들은 선지자들이 살고 있던 동시대에 관한 말씀도 있었고 장래 일어날 일에 관한 말씀들도 있었다. 그 말씀들은 항상 부분적이었고 선지자들의 오고 감에 제약을 받는 시한부적인 것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측면을 지적하여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브리서 1장 1절, 2절) 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본체로서 완전하게 모든 것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하여 주신 선지자라는 뜻이다. 모세가 이런 선지자가 일어날 것을 예언했고 (신명기 18장 15절), 이 예언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 (요한복음 1장 45절).

여기서 주목하여 볼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한 부분이다. 말씀의 본체이신 성자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고 하면, 그 위에, 마치 하나님의 계시로서 예수님의 말씀이 온전하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누가 또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 할 수 있겠는가? 사도 요한이 성경의 마지막 책을 마무리지으면서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요한계시록 22장 18절, 19절) 라고 경고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돕던 사람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경배와 찬양, 죄의 회개와 속죄를 위한 제사,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에 대한 간구와 감사가 그것들이다. 이 중에서도 죄의 회개와 속죄를 위한 제사가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몸을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삼아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던 대제사장이셨다고 증언한다 (히브리서 9장 11절, 12절).

이 속죄는 반복적으로 시행되던 구약의 속죄와 달리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이므로, 모든 믿는 사람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능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또 예수님의 이 속죄의 제사가 완전하여 이제는 죄를 위하여 또 다시 드릴 제사가 없다고 했다 (히브리서 10장 18절).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말미암는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끝으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기를 고대하며 산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삶의 실상이 너무나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와 같은 해방자로서, 다윗과 같은 통치자로서 그리스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현실 문제에 촛점을 맞추고 메시야 상을 그리던 나머지, 정작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초림의 메시야,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셔야만 했던 구속의 주를 바라보는 영적 안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던 니고데모 조차도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다. 성령의 역사는 현실 문제에서 눈을 들어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던 예수님을 바라보게 한다. 기름부음 받은 자로 오신 예수님에게만 새 생명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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