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서정의 마지막은 영화이다. 문자적으로 영화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영화롭게 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의 최종 단계로서 구원의 완성을 뜻하는 것 뿐만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사람들을 인정해 주시고 영광과 영예를 안겨 주시는 것을 뜻한다.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가 영생으로의 부활이다. 부활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자들에게만 약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세상 모든 사람들은 부활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머지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 24절, 29절). 사도 바울도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영광이 “몸의 구속” 곧 육체의 부활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로마서 8장 18절, 23절).

둘째가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 새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 때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이 영원한 심판의 상징으로서 둘째 사망이라고 일컬어지는 불못에 던지울 때 (요한계시록 20장 14절, 15절, 21장 8절),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 간다 (요한계시록 21장 10절-27절).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은 구속받은 사람들이 죄의 실존으로부터 완전히, 영원히 자유한 사람들이 된다는 뜻이다. 과거의 죄를 용서 받음으로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았다 할찌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죄의 실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것이 아니다. 이것 때문에 구원을 받은 신자라 할찌라도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죄와 싸우는 영적 전투를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더 이상 죄와 싸울 필요가 없다. 거기에는 오직 하나님의 실존과 임재만 가득하고, 사단이나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가 하나님께서 믿음을 지킨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며, 그들을 신원해 주시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 일견 하나님께서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 온 자들의 눈물을 닦아 준다는 말이 이상하게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종종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장18절, 19절). 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산다는 것도 종종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여건을 제공한다. 사도 야고보는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 이라고 말씀했다 (야고보서 4장 4절).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다가 상처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이 외에는 이 세상에서 하소연 할 곳이나 위로 받을 곳이 없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눈물로 삭이면서 참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억울함을 신원해 주시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그 영광의 날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입게되는 모든 상처들은 장차 있을 영광스러운 그 순간을 바라보는 영광의 상처들이다.

넷째가 하늘나라에서의 시상식이다. 성경은 장차 있게 될 상급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다니엘서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부활이 있게 될 때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12장 1절-3절).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생활을 집을 세우는 건축자들에 비유하여, 믿는 사람들이 금, 은, 보석과 같이 영구성과 높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터 위에 믿음의 집을 지으라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나무, 풀, 짚과 같은 일시적이고 가치가 낮은 것으로 집을 지으면 불의 시험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의 시험을 견딜 수 있는 믿음의 집을 지은 사람은 그 영구성과 가치를 따라 상을 받게 될 것이지만, 그 집이 불에 탄다면, 그 사람은 마치 불 가운데서 건져냄을 받은 것 같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고린도전서 3장 10절-15절). 물론,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간다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려질 영광의 성격은 상급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규정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행하는 선행과 예수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에 비례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더 부언하자면, 구원의 서정의 최종 단계인 영화 역시 시간적으로 미래에 속한 것만은 아니다. 칭의나 성화와 마찬가지로 순간성과 시간성을 모두 포함한다. 이런 구원의 측면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의 영적 실상에 대하여 말씀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을 뿐만 아니고 (중생),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하늘에 앉았다고 했다 (에베소서 2장 5절, 6절).

이런 언어적 표현은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문법과 관계가 있다. 앞으로 되어 질 일이지만, 하나님의 예언의 확실성을 말할 때,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저자들은 예언되어진 그런 일들이 이미 일어난 사건과 다름이 없다는 뜻에서 시제를 과거형으로 묘사했다. 구원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 과정, 완성이라는 시간의 틀 속에 담겨 있는 것이지만, 구원을 베푸시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의 시작, 과정, 완성 전체가 이미 완성되어진 하나의 사건과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측면에서 깊숙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얼마나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요 축복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또 이런 이해를 기초로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흔들리거나 의심하거나 초조해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시작되고, 진행되고, 완성되는 하나님의 프로젝트라고 하는 것에 감탄하면서, 범사에 하나님께 대한 기대와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하루 하루를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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