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저는 미국 남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는 50 대의 여성입니다. 한국에서 미군 이었던 현재의 남편을 친구 소개로 만나서 미국으로 오게 되었는데, 남편과 산 지는 약 30 여년이 지났습니다. 잘 생기고 자상하고 공부도 많이 했고 미국에서는 꽤 잘사는 집안의 자제입니다. 그런데,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남편은 밤낮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직장에 다니다가도 금방 나오고 모든 일에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혹시 아이가 없어서 그러는가 싶은데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술만 마시면 하는 얘기가 있는데,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서 답답합니다. ‘무섭다.’ ‘친구가 죽어간다.’ ‘폭탄이 또 터졌다.’ ‘피가 난다.’ ‘집에 가고 싶다.’ 하루 종일 T.V. 앞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그런 소리를 하는 남편을 30년이나 보고 살았습니다. 남편은 자동차 면허도 뺏겨 버렸으며, 우리 부부는 낯선 미국 시골에서 평생을 씨름하고 있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잠간 밖에 나가 바람을 쐬려고 해도, 찾아 다니는 통에 그럴 수도 없습니다. 남편은 일 주일 한 번씩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임인 A.A. 클럽에 나가는 것 외에는 두문불출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연락 드렸습니다.

A: 30 여년을 이유도 모르는 고통을 당하면 살아오셨는데, 얼마나 답답하시고 슬프시고 외로우시겠습니까? 몇 번의 만남을 통해서 많은 이야기를 털어 놓으셨지만, 그 안에 말 못할 숨겨진 사연들이 얼마나 많으실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희를 만나서 H 님이 마음의 위로를 얻고 잠시나마 외로움을 잊을 수 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자상하고 착하고 능력이 있었던 남편이 변해서 H 님의 마음이 많이 혼란스러우셨겠습니다.

남편의 이해 못할 태도와 언어와 삶을 보면서,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남편과 생활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남편에 대해서 H 님이 알아야 할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남편은 깊은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으며, 우울증 (depression)까지 겹쳐 있습니다. H 님의 이야기 가운데, 남편은 월남 전에 파병 된 적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 전쟁의 처참한 경험 때문에 남편은 심각한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월남 전이 끝나고 미국에 돌아온 직후, 남편은 미국 정부가 제공한 전쟁 후유증 해소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들었지만, 남편의 현재 상태로 보아서 그 후유증이 전혀 치유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미국에서 중류층의 편안하고 안정된 가정에서 자라난 남편이, 어떤 이유에서든 월남 전에 파병 되면서, 날마다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방에서 폭탄이 터지고, 눈 앞에서 친구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과 외로움은 남편의 자아 깊숙한 곳으로 숨어 들어간 것입니다. 전쟁은 끝나고 한국에서 아내를 만나 고국 미국에 돌아왔지만, 그 때 그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치유되지 않은 채 자신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생활에 현실 적응이 잘 안 되며 자신 속에 파묻히다 보니 우울증이 생긴 것입니다. 남편은 이와 같은 자신의 고통을 잊어 버리기 위해서 알코올에 손을 대기 시작하다가, 지금은 거기서 헤어나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여기서, 아내인 H 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남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월남 전은 끝났지만, 지금 남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그 전쟁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가끔 취중에 하는 헛소리 같은 이야기가 남편의 깊은 내부에서 나오는 신음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시면서 그 아픔을 함께 느껴 주시는 것이 남편을 치유하는 첫 걸음입니다. ‘답답하다.’ ‘무섭다.’ ‘두렵다.’고 하면, H 님 자신은 ‘뭐가 무섭고 답답하고 두렵냐? 나는 그런 당신이 더 답답해 죽겠어’라고 나무라며 다구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감정을 함께 느끼며 안타까워하고 아파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어려운 것이지만, 남편이 H 님의 이런 노력을 보게 되다면, 남편은 H 님이 가까운 벗처럼 따뜻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때부터 자신의 속에 말 못하고 파묻어 두었던 속 이야기들을 마음껏 꺼낼 것입니다. H 님이 그런 이야기들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 당신 그런 일도 있었어요?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얼마나 무서우셨겠어요?’ 이렇게 남편의 입장에서 대화를 시작해 보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그렇게 남편을 도와 주시면서 시댁과 의논하여 상담 전문가의 치료를 받도록 하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남편은 마음의 환자이기 때문에, 아내의 깊은 배려와 도움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