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서정 네 번째는 칭의이다. 성령의 신비한 역사를 통하여 전해진 복음의 말씀을 마음의 귀로 듣고, 중생하여, 회개로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덧입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것을 신학적으로 칭의라고 말한다. 칭의란 말 그대로 의롭지 못한 죄인을 의롭다고 불러 주신다는 뜻이다. 종종 이신칭의라는 말도 사용하는데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뜻의 한자어 표현이다.

칭의의 기본적인 원리는 로마서 4장에 나온다. 사도 바울은 칭의란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가리워주고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건하지 않은 죄인을 의롭다라고 불러 주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갖고 있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의로 여겨 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5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가리워 줄 수 있게 된 것이 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믿고 회개한 것과 예수님이 부활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자 된 것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다. 죄인이 스스로 자기가 선행이나 율법을 지키는 일을 통하여 자신의 의를 생산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자신도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은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을 뜻한다. 옛사람을 벗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예수 믿기 이전의 죄인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이고, 새사람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성령으로 거듭난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칭의란 바로 이 새사람을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불러 주신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이 칭의의 원리를 몇 가지 다른 그림을 연상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가 옷의 비유이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곧,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갈라디아서 3:25절-27절). 그리스도를 옷 입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그림이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라도 그 위에 흰옷을 입으면 흰옷 입은 사람이 되듯이, 죄를 옷입고 있는 사람이 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옷입은 사람은 의인이다. 참으로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것이다” (로마서 4장 25절). 로마서 3장 22절에서는 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하나님의 의”라고 불렀다.

둘째가 감추어져 있는 물건의 비유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로새서 3장 1절-3절). 혹자는 이 감취어져 있다는 말을 마치 물건이 보자기에 싸여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 옷을 입는 것과 유사한 발상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이 말이 마치 귀중한 보배를 은행의 귀중품 보관함에 보관해 두고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거듭난 생명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본성에 거스리는 것이 전혀 없는 새로운 생명이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잘 보관되어 있는 보배와 같다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표현이다. 이렇게 구원받은 생명을 누가 도둑질 해 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구원이 이토록 확실하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구원의 상태에 대하여 쉽게 흔들리거나 요동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 그림은 법정 용어로서 “여겨 주었다,” 또는 “간주해 주었다”는 표현이다 (로마서 4장 22절). 이 말들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데 사용된 말이다. 아브라함의 믿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믿음, 자신의 나이가 백세나 되었고 자기 아내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이 닫힌 것을 알면서도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능히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불러 주셨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믿는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인이라고 간주해 주시는 것이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일견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인처럼 불러 주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겨주신다는 것이다. 본성상 여전히 죄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간주해 주신다. 이것은 마치 태생은 한국 사람이지만, 미국 시민권을 받으면 법적으로 태생적인 미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과 같다. 태생은 죄인이지만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의를 덧입혀 주시고 예수님과 동등한 의로운 자녀의 대우를 해 주시는 것이다.

요약하면, 칭의란 예수 믿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지 않고 의인으로 간주해 주신다는 뜻이다. 태생은 죄인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옛사람이 한 번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듭난 새사람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마치 태생적으로 의인인 것처럼 여기시고 의인처럼 대우해 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셔서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것은, 믿는 사람 자신의 의로운 행위나 선행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이 의로와 지는 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하면, 믿는 사람들의 선행이나 의로운 행위들은 그들을 의롭게 하는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말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바르게 살고 선을 행하는 것은 그들이 의로와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들을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믿음이 진실한 영적 실체라고 하는 것을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는 외적 현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참된 구원의 믿음은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하여 선과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때문에 죄인을 의인이라고 불러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을 따라 의인답게 살려고 하다보니 저절로 선을 추구하게 되고 바른 일을 도모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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