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착하고 성실했던 아이를 데려 가셨을까…. 저 역시 전도사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만 화도 많이 났고 하나님께 원망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하나님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네요.”

지난 2월 27일 아프가니스탄에서 폭탄 테러로 숨진 윤장호 하사(27)의 친형인 윤장혁 전도사(33). 호주에서 시드니감리교회를 섬기고 있던 그는 어느날 역시 호주에 살고 있는 사촌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동생의 순직 소식을 들었다. 한 한국 군인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로 숨졌다고 하는데 아직 실명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성과 나이가 같다는 것. 다른 사람일 거라고 애써 부인해 보려 했지만 결국 자신의 동생임이 밝혀졌고, 그는 부랴부랴 티켓을 끊어 한국으로 떠났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동생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함께해 준 시간도 많지 않았고 형으로서 해 준 게 없다는 생각에 미안하기도 했구요.”

그런데 장례식장에 도착한 윤 전도사는 자신만큼이나, 아니 자신 이상으로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수많은 이들을 만나게 됐다. 유학생 동기, 옛 친구, 직장 동료들…. 사는 지역도 배경도 모두 다른 이들은 오직 한 사람, 윤 하사의 죽음을 마치 가족처럼 슬퍼했다. 심지어 사진을 끌어안고 우는 미군도 있었다.

그리고 윤 전도사는 그들로부터 자신도 미처 잘 몰랐던 동생의 숱한 선행들을 듣고는 마음이 숙연해졌다. 천성적으로 착하고 희생정신이 강했던 윤 하사는 자신의 일에 늘 열심이었고, 그러면서도 남의 어려움을 정성껏 보살폈다. 학창시절에는 매일 새벽 1~2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다른 유학생들에게 머물 집을 알아봐주고, 학교의 행정적인 일까지 일일이 배려해줘서 그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친구들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신앙생활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교회를 다닐 때는 피아노, 색소폰, 드럼, 기타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룰 줄 알았던 그는 자신의 달란트를 모두 동원해 교회를 섬겼고, 전공(경영학)을 살려 교회 재정을 관리하기도 했다. 어느 눈 오던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와 잠깐 눈만 붙이고는 새벽같이 교회 앞에 쌓인 눈을 치우러 간 일도 있었다.

이번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늦은 나이에 입대했지만 오히려 어린 동료들도 하기 싫어하는 힘든 일들을 도맡아 해 왔다. 사고가 있던 그날도 윤 하사는 어머니 장례 때문에 귀국한 병사를 대신해, 자신의 담당도 아닌 기술 교육을 자원했다가 테러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부터 참 남다른 아이였어요. 초등학교 때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친구를 위해 신문배달을 도와주기도 하고, 전도를 하려고 주일이면 아침 일찍 친구 집에 찾아가서 교회로 데려오고. 그 때 전도된 친구들도 이번에 찾아와서 장호가 자신의 멘토였다며 울더라구요.”

이미 잘 알려진대로 윤 하사는 인품뿐 아니라 실력도 갖춘 인재였다. 고등학교 때는 클린턴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미국 인디애나대 국제경영학과에 입학한 뒤 2004년 봄에는 켄터키주 남침례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러다가 국방의 의무를 위해 그 해 12월 한국으로 와서 2005년 6월 통역병으로 입대했고, 서울 송파구 특전사 본부에서 복무하다가 제대를 9개월 앞두고 아프가니스탄행을 자원했다. 가족들이 위험하다며 만류하자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시니 걱정 말라”며 “영어를 잘 하는 내가 통역으로 나라를 돕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윤 전도사는 그렇게 훌륭한 동생을 떠나 보냈지만 이번에 동생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해 주는 동생의 친구들을 보며, 그리고 그들에게서 동생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한 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슬프죠. 아직도 동생 생각할 때마다 울어요. 하지만 한편으로 동생이 신앙생활에 있어서나 유학생활에 있어서나 군생활에 있어서나 기독교인으로서 좋은 모범을 보여준 것이 흐뭇해요. 부모님도 ‘그래도 우리 아들이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하시더라구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할 때에 데려가신 것 같기도 해요.”

윤 전도사는 상(喪)을 마치고 지난 17일 호주로 돌아와 18일 시드니감리교회 1주년 예배를 드리는 등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전도사 일뿐 아니라 워킹 홀리데이 서포팅 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이국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고 있는 그는, 이번 동생의 죽음을 겪으며 더욱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다.

“도전을 많이 받았어요. 동생이 그렇게 훌륭하게 살다가 갔는데 형으로서 적어도 동생의 이름에 먹칠을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저도 더 많은 사람들 돕고, 목회하는 교회도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부모님께도 동생 몫만큼 더 효도하고 싶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