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겨울, 베두윈 소년에 의해 처음 사해 사본이 발견된 지 60년이 지났다. 소년에 의해 사본이 발견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발견된 사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여기에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한다.

사해의 북서쪽 쿰란 유적지 근처에서 성경 사본을 처음 발견한 베두윈 소년의 이름은 Muhammed edh-Dhib이다. 그가 발견한 사본은 모두 7개로써, 이사야 사본A (1QIsaa), 이사야 사본B (1QIsab), 공동체 규율서 (1QS/ Community Rule), 하박국 주석 (1QpHab/ Habakkuk Commentary), 전쟁 문서 (1QM/ War Scroll), 감사 노래 (1QH/ Thanksgiving Hymns), 창세기 외경 (1QapGen/ Genesis Apocryphon)이다. 사본의 정체를 알지 못한 소년은 7개의 두루마리 사본을 생활 처소인 베두윈 천막으로 가져가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쿰란 근처에서 이 같은 고대 사본이 이전에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사본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베두윈 가족은 사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몰라 몇 일간 천막을 지탱하는 기둥에 매달아 두었다. 그리고 이따금 베두윈 이웃들에게 사본을 보여주었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 규율서 (Community Rule)는 두 조각으로 찢어졌다.

몇 일이 지난 후 소년의 가족은 사본을 팔기 위해 베들레헴 골동품 매매상인 Ibrahim ‘Ijha에게 가져갔다. 그러나 이브라함 골동품 상인은 베두윈이 가져온 사본을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쓰레기라며 무함마드 가족에게 돌려주었다. 이브라힘은, 사본을 유대인 회당에서 훔쳐온 장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베두윈은 사본을 들고 근처 시장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베두윈은 사본을 구입하겠다는 시리아 정교회 소속의 수도사를 처음 만났다. 그러나 무함마드 가족이나 수도사 역시 이 사본의 가치를 알지 못하였기에 가격 흥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침 곁에서 이들을 지켜보던 한 아랍 사람이 칸도 (Kando)로 잘 알려진 구두 수선공이며 골동품 매매상인 Khalil Eskander Shahin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칸도 역시 사본의 가치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베두윈 가족은 7 영국 파운드 (2003년 미국 달러 가치로 28달러)를 받고 3개의 사본을 수도사에게 팔았다. 그리고 천막으로 돌아온 베두윈 가족은 남은 4 개의 사본을 칸도에게 6 영국 파운드 (24달러)를 받고 팔았다.

이렇게 해서 베두윈 소년에 의해 처음 발견된 7개의 사본은 모두 13 파운드 (52달러)에 팔렸다.

칸도는 6 파운드 (24달러)를 주고 구입한 4 개의 사본을 구입할 적임자를 찾던 중에 시리아 정교회 (Syrian Orthodox Church)를 통하여 Mar Samuel로 알려진 주교 Athanasius Yeshue Samuel을 만났다.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칸도가 가져온 사해 사본을 주의 깊게 살펴본 후 진품인 것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24 파운드 (96달러)에 4 개의 사본을 모두 구입하였다. 24 파운드 (96달러)를 받은 칸도는 베두윈 소년에게 6파운드 (24달러)를 주었으니 72달러의 차익을 남긴 장사를 하였다.

이미 앞서 시리아 수도사에게 팔린 3 개의 사본은 다른 경로를 통해 골동품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이 소식을 히브리 대학 고고학과 교수인 엘리에셀 수케닉 (Eliezer Sukenik)과 벤자민 마자르 (Benjamin Mazar)가 들었다. 이 과정에서 수케닉과 마자르 교수는 3 개의 사본을 어렵지 않게 구입하였다. 이때 구입한 3 개의 사본은 1QIsab, 1QM (War Scroll), 1QH (Thanksgiving Hymns)이다. 이들 두 교수는 베두윈 소년에 의해 발견된 4 개의 다른 사본이 아타나시우스 주교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사본을 구입하기 위하여 주교를 만났지만, 가격을 조정하지 못하여 사본 구입에 실패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사본의 가치를 직감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주교는 1948년 2월 21일 4 개의 사본을 팔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위치한 미국 역사학회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를 방문하였다. 여기에서 주교는 ASOR의 연구원인 John C. Trever 박사를 만났다. 트레버 박사는 주교를 통해서 보게 된 사본이, 본인이 연구하던 당시로는 가장 오래된 Nash Papyrus와 비교해 보고 서로 유사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트레버 박사는 주교의 허락을 얻어 몇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지금도 이 사진은 사본의 본래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된다.

주교는 예루살렘에서 큰 돈을 받고 사본을 파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주교는 4 개의 사본을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가져갔다. 베이루트에서도 사본을 파는데 실패한 주교는 사본을 미국으로 가져갔다.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4 개의 사본을 팔기 위해 먼저 워싱턴의 의회 도서관 (Library of Congress)에 사본을 전시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사본을 구입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주교는 1954년 6월 1일자 월 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에 ‘사본을 판다’는 조그만 광고를 냈다 (사진).

이 광고는 유대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아타나시우스 주교가 뉴욕에 머물며 사본을 매매한다는 소식을 이스라엘의 고고학자이며 군 장성 출신인, 이가엘 야딘이 들었다. 이가엘 야딘은 엘리에젤 수케닉 교수의 아들이다. 그래서 이가엘 야딘은 벤자민 마자르 교수와 함께 1954년 7월 1일 뉴욕의 Waldorf-Astoria Hotel에서 주교를 만났다. 그리고 오랜 협상 끝에 25만 달러를 지불하고 4 개의 사본을 구입하였다. 당시 25만 달러는 현재 화폐로 약 204만 달러의 가치를 갖는다. 주교는 96달러를 주고 구입한 4 개의 사본을 25만 달러에 팔았으니 큰 이익을 보았다. 그러나 4 개의 사해 사본의 값이 25만 달러인 것은 여전히 헐값에 불과하다.

▲사진은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1QIsaa 사본의 진품이다
힘든 과정을 거쳐 쿰란 1동굴에서 발견된 7개의 모든 사본은 결국 유대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앞서 엘리에젤 수케닉과 벤자민 마자르 교수에 의해 구입된 3개의 사본 그리고 1954년 이가엘 야딘이 아타나시우스 주교로부터 구입한 4개의 사본은 처음에는 예루살렘 록펠러 박물관 (Rockefeller Museum)에 전시되었다. 이후 이 사본들은 1965년 12월 대영 박물관에 ‘요르단의 사해 사본 (Jordanian Dead Scrolls)’이란 이름으로 전시되었다. 이때부터 사본은 학자들과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1967년 6일 전쟁 이후 사본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박물관에 전시되어 온 이사야 사본A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현재 이스라엘 박물관에 전시된 사본은 사본의 진품이 아닌 같은 재질에 같은 내용을 복사한 모조품이다.

.
이주섭 목사(멤피스장로교회)는 성경의 사실적 배경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를 학습하였고, 예루살렘 대학과 히브리 대학에서 10여년에 걸쳐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 고고학, 히브리인의 문화, 고대 성읍과 도로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4X4 지프를 이용하여 성경의 생생한 현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문의 jooseob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