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성경 해석 원리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므로 신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에 개인의 구원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약에서와 같이 한 사람의 구원의 성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구약은 “마음의 할례”라는 말로 구원이 민족적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신명기 30장 6절, 예례미야 4장 4절). 그러나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하여, 한 사람의 개인적인 구원과 교회의 관계, 구약과 신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메시야 사상을 설명하는데 전체를 할애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신구약 전체 속에 맥맥히 흐르고 있는 이 구원의 도리를 바르게 이해하려고 하면 몇 가지 준비 작업이 필요한데, 그 중의 하나가 성경 해석이다.

해석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1) 어려운 어구나 문장 등의 의미를 밝혀 내거나 그 내용을 설명하는 것, (2) 어떤 일이나 현상들에 대하여 자기 나름으로 어떤 의미나 의도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거나 판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야후 사전). 성경을 주석, 해석, 혹은 주해 한다고 할 때는 (1)의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해석이란 성경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본문이 말하고 그대로 읽어내어 그 본문의 의미와 거기에 담겨 있는 메시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내고, 그것을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이다.

해석이라는 말로 성경에 다가가는 데는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1)의 의미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기 위한 접근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2)에서와 같이, 나름대로의 자기 생각이나 경험을 성경 본문에 담아 내기 위한 접근 방법이다. 통상, 전자를 가르켜서 성경을 읽어낸다 라고 말하고, 후자를 가르켜서 성경을 읽어 들어 간다라고 표현한다. 후자가 성경을 읽는 주체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체험을 기초로 하여 성경을 해석 할 것을 강조한다면, 전자는 성경을 읽는 주체의 생각이나 경험과 관계 없이 성경 본문이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신 객관적 진리라고 하는 기초 위에서 성경을 해석할 것을 강조한다. 후자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종종 “내” 생각이나 체험을 증명하기 위하여 성경 본문을 인용하는 성향이 강하다. 전자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경 본문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기가 경험한 삶의 변화를 실례로 제시하는 성향이 강하다. 현명한 독자라고 하면 건전한 성경 해석 방법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라고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을 잘 읽어 내는 것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 원리들이 있다. 첫째가 문법적 해석 원리이다. 이것은,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의 의미나 의도는 무엇인가?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를 성경 원문의 문법 구조와 앞 뒤 맥락을 따라 연구하는 해석 원리이다.

예를 들면 주기도문의 서두를 살펴 볼 수 있다. 한글 성경에는 주기도문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지만 헬라어 본문은 “아버지, 우리의, 하늘에 계신” 순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 주는 “아버지”라는 말이 하나님의 소재를 보여주는 “하늘에” 보다 우선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 아버지”가 친밀한 관계를 말한다면 “하늘에 계신”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속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가까이 계실 뿐만 아니라 속성상 초월적인 분이라는 뜻이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보다” “아버지”를 맨 앞에 두심으로 강조하고자 하신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런 연구를 통하여 하나의 해석에 이르게 된다.

두번째가 역사적 해석 원리이다. 이것은 본문을 두 가지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하나는 역사적인 관점이다. 성경 저자들이 있던 시대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화자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청중의 입장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살던 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그들이 살던 삶의 배경을 연구하는 것을 포함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그런 맥락 속에서 이해하게 된다면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누구나 다 십자가를 하나의 악세사리처럼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의 관점은 구속사적인 관점이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라고 하는 구도 속에서 연구하고 이해 하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이사야 34 장 16 절 ). 이 말씀에 나오는 “짝”이라고 하는 말은 종종 메시야를 중심으로 하여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라는 구도 속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여기의 “짝”이라고 하는 말은 좀 더 포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하신 내용과 역사적으로 일어난 실제 사건들”이라는 구도 속에서도 이해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속의 역사는 인간이 살면서 만들어 가고 있는 세상 역사 속에서 실현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과 실제로 오순절날 보혜사 성령이 오신 것이 한 짝이라고 할 수 있다.

세번째가 신학적 해석 원리이다. 물론 신학은 다양하다. 이 말은 신학이 다양한 것만큼 성경 본문의 해석이 다양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학적 해석 원리는 신학을 하는 주체가 어떤 신학으로 채색된 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느냐에 따라 한 단어, 한 문장, 한 권의 해석이 다를 수 있는 만큼 주관적 성경 해석의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성경을 보는 것 같지만 칼빈주의자의 해석이 알미니안주의자들의 해석과 같을 수 없고, 장로교회 해석이 침례교회나 오순절교회의 해석과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교단을 초월해서 오늘 날의 신학은 크게 자유주의 신학, 복음주의 혹은 신복음주의 신학, 보수 혹은 정통 개혁주의 신학으로 삼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성경 해석을 할 때, 이런 신학적 입장들의 구분 없이 비빔밥 식으로, 혹은 아전인수 격으로, 혹은 나름대로 갖고 있는 목회 혹은 신앙생활의 어떤 목적이나 편의를 따라, 신학의 원리를 들쑥 날쑥 사용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되었든, 독자들은 이런 신학적 입장들이 성경 해석이나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유념하여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바르게 정립해 가지고 있어야,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일에 일관성 있는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글: 간단한 말씀 적용 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