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역의 뜻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비역”이라는 말을 아는 분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필자는 어떤 책을 읽다가 ‘비역’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그런데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집이나 연구실 책상에 늘 놓아두는 국어사전을 펼치면서, 무슨 ‘비’자에 무슨 ‘역’자일까 궁금해 하면서 찾아보았다. ( )안에 한자를 넣었더라면 한자를 보고 대강 그 뜻을 알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단어를 찾았는데, 놀랍게도 비역에는 한자가 없었다.

‘교회’(敎會), ‘학교’(學校) 같은 쉬운 말도 한자가 있는데, 뜻밖에도 비역이라는 어려운 단어가 ‘오늘,’ ‘어저께’ 같이 한자 없는 순수 우리말이었다. 그 의미는 뜻밖에 “남자끼리 하는 성행위” “계간”(鷄姦) “남색”(男色) “수간”(獸姦)으로 되어 있고, 영어로는 ‘sodomy’였다. 필자는 사전을 보면서 정말 놀랐다. 아니 순수 우리말에 동성연애(同性戀愛)가 있다니.... 한자가 우리 문화 속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벌써 비역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비역의 시작

인류학자들은 비역이 인류 역사와 더불어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비역이 시작된 곳은 감옥이란다. 남자들끼리 모여 사는 감옥에 여자가 있을 수 없고, 감옥에는 사형수, 무기수 등 장기 복역자가 있게 마련이다. 욕정에 불타 이성을 찾을 한창 젊은 나이에 여자가 없으므로 자연히 남자와 성적 욕구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감방에는 장기수 또는 별(감옥살이 한번 할 때마다 별을 하나씩 단다고 함)을 많이 단 감방장이 있다. 감방에 앳된 꽃미남이 신참으로 들어오면 그 신참은 여지없이 감방장의 성적 노리갯감이 된다. 다음으로 비역이 비롯된 곳은 외진 곳에 위치한 군부대 또는 장기간 항해하는 군함이다. 민간인들이 전혀 들어갈 수 없는 외딴 군부대나 오랜 시간 항해하는 함정에 예전에는 여자 군인이 없었다. 남자들끼리만 모여 있는 군부대에 비역 성향이 있는 지휘관이 새로 온 꽃미남 신참 병사를 성적 노리갯감으로 여겨 욕을 보이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타고난 비역


본래 하나님께서는 일남일녀를 창조하시고 두 남녀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생산하여 역사를 이어 가는 질서를 부여하셨다. 따라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성과 사랑을 나누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더러는 태어날 때부터 이성이 아니고 동성을 좋아하는 유전인자를 갖고 태어난다고 한다. 그런 사람은 이성을 싫어하고 동성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므로 동성끼리의 연애와 결혼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정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옛날에는 비역이 부끄러운 것이고 비정상인 취급을 했는데, 근래에 와서 소위 커밍아웃(coming out)하여 스스로 비역자임을 밝히고 아무 부끄럼 없이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동거하면서 가정을 이룬다. 자녀가 생겨날 리 만무하므로 아이를 입양하여 기르는 이상한 세상이 되었다.

성경이 규정한 비역


기독교의 표준은 성경이다. 성경이 하라고 하는 것은 해야 하고, 하지 말라고 금한 것은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남색 하는 자를 추방하도록 명하셨고(왕상:14:24, 15:12, 22:46), 미동(美童)을 엄격히 금지하셨다.(신 23:17, 왕하 23:7) 더 나아가 레위기 20장 13절에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명하여 비역자를 죽이라 명하셨다. 바울 선생도 남색 하는 자를 정죄하고 있다.(롬 1:27, 고전 6:9, 딤전 1:10) 비역을 영어로 'sodomy'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비역자의 원조는 소돔(Sodom)과 고모라였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집에 들어간 천사들을 끌어내 욕보이려 했던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불바다가 된 사실을 성경은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비역을 용인한 교회


세상은 어떨지 모르지만, 교회는 비역을 결코 용인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금하였기 때문이다. 살인, 간음,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되는 것 같이 비역도 해서는 안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경향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 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그것이 일종의 질병이라면 그 병을 고쳐주어야 한다. 못 고치는 병이라면 그냥 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시각장애를 갖고 태어났다면 그 장애를 갖고 살아 갈 수밖에 없다. 비역자도 같은 원리이다.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행위를 용납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어린이를 성폭행하는 성향을 갖고 태어난 사람에게 성폭행을 하도록 돠 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다.

성공회, 루터교회, 그리고 감리교회는 이미 비역자에게 목사 안수를 허용했다. 그런데 이 문제로 오랜 세월 논쟁을 거듭하던 미국 장로교회[PC(USA)]가 금년에 드디어 비역자 신학교 졸업자에게 안수의 길을 열었다. 이제 미국 장로교회에서는 남자 목사가 남자 아내를, 여자목사가 여자 아내를 데리고 목회를 할 경우가 생겼다. 교회가 이를 용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 배치되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비역자를 반드시 죽이라 명하셨다. 죽이면서까지 그 행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물론 현대에 비역자를 죽일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교인들의 영적 목자가 되는 목사가 되는 길을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교회가 성경에 정면 위배되는 일을 허용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인가?

오늘날 교회가 왜 이렇게 가고 있는지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교회는 어떻게 믿지 않는 사람을 하나라도 구원할 것인가. 전도와 선교, 그리고 봉사와 헌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시간과 귀중한 헌금을 써야 하건만, 비역자에게 목사 안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시간과 헌금과 정력을 쏟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비역자에게 목사 안수하는 교회를 어떻게 보실까.

지금이라도 잘못된 것은 시정해야 한다. 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루터, 캘빈의 개혁 정신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e)이 아니던가. 점점 세속화되어 성경에서 멀어져 가는 현대교회를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할 때이다. 현대교회여! 성경으로 돌아가 여호와의 말씀을 경청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