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음, 비명, 욕, 비방 그리고 저주의 심리학

지금 살이 찢겨지고, 엄청난 고통과 죽음의 공포로 인하여 혼비백산하여 있을 때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할 것이고, 무엇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일반적으로 극단의 고통에 처하면 인체는 반사적 생체 반응을 보이게 된다. 단발마의 비명이 첫번째 반응이다. 그리고 한 마디의 비명이 끝나고 그나마 정신을 차리면 짧은 욕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저주이다.

이것은 육체의 방어기제이다. 신음, 비명과 욕과 비방과 저주의 긍정적인 면은 이것들을 하는 순간엔 뇌가 그것에 집중하여 육체의 고통을 잠시라도 덜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뇌가 지나친 고통에 직면하지 않도록 생체학적인 차원에서 탈출구를 마련해 주는 차원의 것이기도 하다. 신음, 비명, 욕, 비방과 저주는 그런 유용한 면이 있다. 여기까지가 예수님과 함께 못을 박힌 두 행악자의 공통적인 행동이었다(마태복음 27:44, 누가복음 23:39). 그러나 이 시기가 조금 지나면 뇌는 스트레스의 상황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한 아드레날린 호르몬을 온몸에 보내게 되고, 몸을 마취시킴으로 안정을 찾도록 해준다. 이 때가 되면 사람은 생체적 반응이 아닌, 심리적 반응을 할 수 있는 단계가 된다. 이 때 인생의 후회,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염려 등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을 한 사람이 비방을 그치고, 자신의 삶에 대하여 반성하고, 예수님께 구원을 청한 강도다. 이것이 우리가 이전에도 살핀대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밖힌 강도들의 반응이었다(누가복음 23:40-41).

고통의 승화 단계

이것을 굳이 단계로 표현하자면, 1단계는 신음과 비명, 2단계는 욕, 3단계는 대상을 염두에 둔 비방과 저주, 4단계는 자기 후회, 5단계는 남들 걱정, 그리고 6단계는 인생의 정리쯤이 될 것이다. 지속적으로 예수님께 욕하고 저주한 행악자는 3단계쯤, 그리고 회개한 강도는 6단계쯤으로 성숙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시를 읊조리는 것은 몇 단계쯤 되는 것일까? 그것도 그 시에 감정 이입을 제대로 하여서 읊조리는 단계라면?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 시였는지 아니면 실제 였는지를 모를 정도였다면 어느 단계일까?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렇게 시를 읊조리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고통 속에서, 버림받았다고 한탄, 절규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럼으로 이 상황은 암호가 된다. 예수님의 뜻이 감추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읊조린 그 시는 시편 22편, 다윗왕이 지은 시였다. 그런 극심한 고통 속에서 시를 기억해 낼 정신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확한 시를 찾아내셨고, 그 시 구절을 읊조리심으로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암호문을 주신다. 그 암호문엔 비밀이 담겨 있다. 그 암호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 암호의 해독은 시편 22편으로 가야만 하고 그 저자를 알아야 한다.

다윗왕의 암호

시편 22편을 지은이는 다윗왕이었다. 그는 일찍이 왕이 되도록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고,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았었다. 한때 한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로 평화스러운 곳에서 하프를 연주하던 소년이, 한때는 한 국가의 청년으로 국가의 원수인 골리앗을 처단하여 존경을 받고, 한 아내의 남편으로 사랑을 받던 이가 그 모든 것에서 쫒겨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구걸 아닌 구걸을 해야 하고,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미친 척을 했어야 하고, 장인 사울의 창과 개 같이 쫒는 군사들을 피하여 도망다녀야 했다.

이러한 모습은 일찌기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로 천국에서 평화롭게,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이 땅에 왕으로 오셨지만, 정치권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당하고, 배척 당하고, 그들과의 경쟁을 피하여 예루살렘 외곽에서 돌면서 전도하고, 힘든 광야를 지나는 여행을 했어야 하는 예수님의 상황과 비교될 수 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가장 자랑스런 왕인 다윗의 청년 고생의 상황은 신약이대에 전 인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청년 시대의 고난의 상황과 가장 가깝게 비교가 된다. 특별히 시편 22편은 구약의 다윗왕의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신약의 예수님의 고난을 예고편으로 보여주는 데 그 놀라움이 있다.

시편 22장의 암호

시편 22편에서 다윗이 고백하는 상황은 참으로 처참하였다. 그는 자신이 물같이 쏟아 졌으며, 모든 뼈가 어그러졌으며, 마음이 촛밀 같이 녹았으며, 혀가 잇틀에 붙었으며, 악한 무리가 수족을 찔렀다고 고백한다. 또한 자신의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았다고 말한다 (15-18절). 이것은 다윗이 버림받고 쫒기면서 당한 고난이었지만, 또한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잡히시고, 심문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오르는 과정과 십자가에서 못박힌 상황을 눈으로 본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시편 22편과 십자가의 정황은 너무나 정확하게 대칭이 된다.

왕으로 부름을 받은 다윗, 그리고 버림받은 다윗, 왕으로 보내심을 받으신 예수님, 그리고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상황은 정확하게 대칭되고, 고통의 정도와 깊이가 정확하게 대칭된다.

시편 22편의 결론으로 오는 암호 해독

시편 22편에 대하여 중요하게 알 것은 다윗의 한탄이 곧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깊은 소망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위대함이다. 다윗은 현실적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 있는 것을 없다고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인간적인 해석에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자신의 상황을 살피고 소망을 선포한다.

실제로 다윗왕은 그런 고통을 이기고 소망과 믿음의 진정한 승리자가 된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수없이 시도하였던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죽이지 않고 의를 이루고, 피흘리지 않고 유다왕국을 차지하고 훗날 이스라엘 왕국을 통일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차라리 자신의 피를 흘리실 뿐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심으로 의를 이루시고 이 땅과 하늘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다(마태복음 28:18).

그러므로 시편 22편은 여호와의 버리심에 대한 한탄으로 시작하지만 여호와의 축복을 선포하는 것으로 마친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시편 22:27-28). 다윗은 이 시편을 통하여 위대한 비전을 보았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고, 경배하는 것은 다윗의 시대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대 신학하고도 맞지 않는다. 왜냐면 선택된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 깊게 살필 것이 있다. 그 것은 이 시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비한 것이며, 십자가를 통하여 다윗의 고백이 완성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는 역사가 이제 완성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복음이 거의 땅끝까지 전파되었다.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은 예를 들어 파푸아 뉴기니 정글에서 500여명 단위로 살고 있는 촌락의 사람들 뿐이다. 나머지 모든 민족들은 복음을 들었고, 그 중에 믿음의 사람들이 모든 땅끝에서 부터 여호와를 경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시편의 1절을 우리에게 암호로 주심으로 시편 22편의 결론을 암호 해독문으로 주시는 것이다. 결국 자신은 분명 버림받아 죄없는 순수로 죽지만, 그 결과로 모든 인간들이 순수를 회복하고, 땅의 모든 끝에 있는 사람마저도 주님께 돌아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스스로 버린 목적이라는 십자가의 비밀을 알도록 하신 것이다. 그럼으로 십자가의 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자신의 버림받아 죽는 현실의 인정이며, 암호로 주어 암호가 해독된 자들에게 시편 22편의 결론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십자가의 버림받은 죽음으로 이제 그리고 2008년 현재 우리 세대는 다윗의 시편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고, 복음이 어떻게 땅끝까지 전파가 됨으로 시편이 어떻게 완성되고 있는지를 보고 있는 증인들이다.

이글은 <크로스코드>의 출판사 비전북하우스 제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