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최후를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인생의 주제가 무엇인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놓지 않고 붙들고 계셨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랑하는 젊은 남녀가 한밤중에 드라이브를 하다가 숲 속에 차를 멈추고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폭력배가 들이 닥쳐 차 문을 부수고 남자를 끌어내 흉기를 휘두르며 몰매를 때렸습니다. 그는 사력을 다해 허겁지겁 그 현장에서 도망쳐버렸습니다. 자기 애인을 폭력배들에게 홀로 남겨두고 말입니다. 폭력배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 남자는 자기 애인에게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고백했겠습니까? 죽도록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죽어서도 당신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겠노라고, 이렇게 사랑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고백은 잠시 후에 허망한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한 때 대학생들에게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정말 멋있게 잘생긴 남학생이 옷은 잘 입었지만 보기에도 민망하리만큼 못생긴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학생들이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저 여자애 아버지가 재벌인가 봐.” 잠시 후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대단히 예쁘게 생긴 여학생이 자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못생긴 남학생과 데이트를 합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저 남학생 사법고시에 붙었나 봐.” 우리들의 사랑이 이렇게도 조건적이고 상황적이라면, 우리는 그 조건이나 상황을 사랑하는 것이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나 상황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조건과 상황이 변하게 될 때, 그 사랑은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환경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사랑해야만 끝까지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둘러싸고 환경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의 죽음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죽음인지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절박한 순간에 자기 자신을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아십니까? 사랑이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과 결론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삶이란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삶의 최상의 가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십자가를 지신 것도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사랑을 빼버린다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왜 인생의 목적을 사랑에 두어야 하고,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지켜가야 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이 땅에 사랑보다 더 가치 있는 유산은 없습니다. 가장 오래 영향을 끼치는 것은 우리의 성취나, 성공, 재산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말했듯이 “우리가 무엇을 하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얼마만큼 사랑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의 임종 순간을 지켜보았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졸업장이나 재산 문서, 자격증이나 보석을 보여 달라는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들이 다시 한 번 보고 떠나길 원했던 것은 그가 생전에 사랑의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