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포드(Henry Ford, 1863년 7월 30일 ~ 1947년 4월 7일)는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서쪽의 작은 마을인 디어본(Deerborn)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기계를 가지고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 중에도 고장난 시계는 모두 그의 손을 거치면서 말끔히 수리가 되었습니다. 1876년, 그는 13살 때 아버지와 마차를 타고 디트로이트에 갔다가 말로만 듣던 증기자동차를 보고 감탄하게 됩니다.

“우와! 신기하다. 말로만 듣던 증기자동차를 직접 보게 되다니! 그런데 아저씨, 이 자동차는 어떻게 말이 끌지 않는데도 저절로 가지요?” “아저씨, 이건 뭐예요?”

포도는 운전사가 귀찮을 정도로 증기자동차의 원리를 자세히 캐물었습니다. 그날부터 그의 꿈은 ‘시계 박사’가 아닌 ‘자동차박사’로 바뀌었습니다.

1876년,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청운의 뜻을 품고 디트로이트로 가서 ‘미시간 차량회사’라는 기계제작소에 들어갔는데, 일주일 만에 해고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포드가 아무도 고치지 못한 기계를 30분 만에 고쳤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리에 위기의식을 느낀 공장장이 쫓아낸 것입니다.

그 당시 디트로이트에 발명왕 에디슨이 세운 ‘에디슨 전기회사’가 있었는데, 포드는 그 곳으로 일터를 옮겨서 전기에 관해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자동차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포드는 189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드디어 2기통 짜리 엔진을 만들게 됩니다.

그로부터 약 2년 6개월이 지난 1896년 5월, 포드는 4륜 마차에 2기통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최초의 자동차를 완성합니다. 포드는 그 차를 “포드 쿼드리사이클”(Ford Quadricycle)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동차가 작업실 문보다 커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포드는 도끼를 들고 와서 문과 벽을 부수고 공간을 만들어 시운전을 했는데 성공적이었습니다.

포드는 2인승 4마력 시속 45km의 최초 자동차를 친구에게 200달러에 팔았습니다. 이 차는 현재 그의 고향 디어본에 있는 포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에디슨(사진 가운데)은 10년이나 아래인 포드(사진 왼쪽)의 열정과 노력의 결실을 보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발명왕 에디슨과 자동차 왕 포드는 깊은 우정의 관계로 발전합니다. 1898년, 포드는 그의 두 번째 차를 개발합니다.

그 후 포드는 회사를 그만두고 1903년 6월 16일 맬콤슨(Malcomson) 등 몇 명의 투자자들과 함께 포드 자동차 회사를 창업하였습니다. 포드는 회사를 세우면서 ‘혼성주주제’라는 새로운 경영법을 도입합니다. 이것은 회사의 일정 지분을 투자자에게 배분하는 것으로 다른 이들의 돈과 기술을 이용해 차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포드는 값싸고 실용적인 차를 만들어 서민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경쟁사를 이기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1903년 7월 2기통 엔진의 자동차를 생산하였고, 1908년 혁명적인 자동차 포드 T형을 개발하였습니다. 이 포드 T형은 1927년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1.500만대를 만들어 20세기 전반 전 세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913년 컨베이어 벨트 생산 방식을 도입하여 자동차 대량생산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컨베이어 시스템은 1공정에 18분의 제조시간을 5분으로 단축해 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당시 다른 자동차가 2천 달러일 때, 포드 T형의 가격을 260달러로 낮출 수 있었습니다. 포드사의 자동차 대량생산으로 자동차는 점차적으로 일반인들의 필수품이 되기 시작했고, 거대한 미국 경제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포드의 경영원리 포디즘은 4개의 봉사원칙인데, 그것은 첫째, 미래에 대한 공포와 과거에 대한 존경을 버릴 것, 둘째, 경쟁을 위주로 일하지 말 것, 셋째, 봉사가 이윤에 선행할 것, 그리고 값싸게 제조하여 값싸게 팔 것 등입니다.

그에 대한 일화 중 두 개를 소개합니다. 디트로이트 도시의 어느 겨울에 한 유명한 정비사가 출근하는 길에 자동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는 고장의 원인을 찾기 위해 차를 길옆에 세워 놓고 열심히 차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고 차는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날씨는 점점 추워져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었을 때, 지나가던 자동차 하나가 멈추더니 노신사 한 분이 차에서 내려 “도와드릴까요?”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 정비사는 속으로 “디트로이트에서 가장 유명한 정비사인 내가 못 고치는 차를 자기가 고치겠다니”하고 생각하며 노신사를 보았습니다. 노신사는 차의 몇 군데를 만지더니 시동을 걸어보라고 했습니다. 정비사는 별 기대감 없이 키를 돌리는 순간 시동이 쉽게 걸렸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저 노신사가 누구인가? 나도 고칠 수 없었던 차를 손쉽게 고칠 수 있다니...” 궁금해 하고 있는 그에게 노신사는 명함 한 장을 주고 떠났습니다. 그 명함에는 ‘헨리 포드’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의 말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포드가 한 소년과 함께 학교교육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년의 이름은 존 다링거였는데, 포드가 학교교육에 대해 상당히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년은 포드에게 다음과 같이 쏘아 붙였습니다. “할아버지, 이젠 세상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현대’란 말예요.” 그 말을 들은 포드는 바로 대답했습니다. “얘야, 그 ‘현대’를 발명한 게 나란다.”

그의 저서에는 “오늘과 내일”(Today and Tomorrow, 1926), “나의 산업철학”(My Philosophy of Industry, 1929) 등이 있습니다.

미국 역사상 20세기 전반에서 가장 미국적인 인물을 뽑으라면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과 자동차 왕 헨리 포드일 것입니다. 포드의 ‘현대’ 발명은 인류의 삶을 빠르고 편리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은 이처럼 위대합니다.

한 사람 사도 바울의 순종으로 1세기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한 사람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중세기의 썩었던 기독교가 다시 정상괘도로 돌아왔습니다. 한 사람 조나단 에드워즈로 말미암아 18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 빌리 그래함의 헌신으로 오늘날 전 세계에서 2억 명이 넘는 사람이 복음을 들었고 그 중에서 8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습니다.

그 한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디모데후서 2:21).

권석균 목사, 남침례신학교(Ph.D) / 애틀란타 지구촌교회 담임

출처: 케이아메리칸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