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끊임없이 재평가를 반복합니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역적이 되기도 하고, 오늘의 “문제아”가 내일은 “역사의 주역”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시각은 항상 유동적(流動的)이어서 엎치락뒤치락 변화무쌍한 다른 평가들을 산출해 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수군거림”이나 “비아냥” 때문에 낙심하거나, “과분한 칭찬” 때문에 우쭐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가치관과 철학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오늘의 칭찬은 언제고 내일의 비난이 될 것이고, 과거의 박절한 낮은 평가는 내일의 극찬으로 바뀌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만큼 멀미나는 삶을 산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한국 근대화의 주역이었던 박정희는 독재정권이라는 이름으로 심심찮게 자리를 바꾸어 앉습니다. 전두환은 한국 민주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기도 하지만, 현대 기업의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강력한 카리스마의 대명사로 칭찬 받기도 합니다. “지옥도 과분하다”는 평가를 받아 왔던 노태우 대통령은 얼마 전 “폐”에서 발견된 한 개의 “침”(needle) 때문에 비록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반드시 국민의 염원을 담아 회복해야 할 “우리들의 각하”가 되기도 했습니다. 절벽에서 몸을 던져 삶을 마감해야 했던 가엾은 “심청이” 노무현 대통령은 “깜”이 아니라는 평가에 시달려 왔으나 “죽음” 한 방으로 “깨어 있는 양심, 실천하는 양심”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들 모두의 평가는 또 한 번 “반전 드라마”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는 없고, 단지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史觀)만이 있을 뿐이라”는 지적은 그래서 진리입니다.

경남 진주시의 “김용주” 전 시장은 1950년 한국전쟁 통에 폐허가 된 도시를 1952년부터 복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많은 선진국의 자문을 받으면서 당시 폭이 6m였던 도로를 35m로 확장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의회 의원들과 성난 시민들의 거센 반발로 폭 25m의 4차선으로 도로를 줄여 공사를 했습니다. 전쟁 직후의 아수라장 속에서 국민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역적 행위라고 비난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의 정치 생명도 그 도로공사와 함께 땅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60년이 지난 지금, 진주시의 모든 시민들은 그의 선견지명에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항상 그런 식입니다.

이스라엘의 국부인 모세(Moses)는 지금은 모두가 떠받드는 지도자의 표상이지만, 출애굽 당시에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비난을 달고 살았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하나님의 일군들은 “고통을 주는 자”라는 호칭을 이름처럼 가슴에 달고 살았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향하여, “사울”은 “다윗”을 향하여, 그리고 거짓 선지자 “하나냐”는 “예레미야”를 향하여 이 절망적인 선언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늘 날 우리 모든 신앙인들에게 존경 받는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바람에 바스락거리며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가랑잎 같은 사람들의 변덕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