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세기의 왕실 결혼이라는 영국 왕위 계승 2인자인 윌리엄과 평민 출신 미들턴 양의 혼인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영국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2억의 사람들이 이 혼인식을 TV 중계로 시청했다. 이 결혼식은 영국의 소중한 문화재이며 전 세계 성공회의 중심 성당인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그리고 전 세계 영국교회(성공회)의 최고 수장인 켄터버리 대 주교에 의해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켄터버리 대주교,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성당이 상징하는 성공회(聖公會)는 어떤 교회일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공회를 가톨릭교회가 아닌 개신교회로 알고 있다. 그것이 사실일까? 우선 성공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역사적으로 더듬어 보기로 한다.

- 헨리 8세와 왕위 계승 문제

16세기 영국은 튜더 왕조(Tudor Dynasty)가 다스리고 있었다. 튜터 왕조를 시작한 헨리 7세는 그 때 국제적으로 미약한 영국을 강대국으로 만들 야심을 갖고 당시 강력한 제국 스페인과 왕실 혼사를 꾀해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이들은 컬럼버스를 신대륙에 항해 시킴)의 딸 캐터린(Catherine of Aragon)과 장남 아더(Arthur)와 결혼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결혼 얼마 후 아더가 사망하자 헨리 7세는 스페인과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 둘째 아들 헨리를 형수인 캐더린과 결혼시켰다.

헨리 7세가 세상을 떠나자 헨리가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저 유명한 풍운아 헨리 8세가 된다. 헨리 8세와 재혼한 캐더린은 아이를 가졌지만 유산을 계속했고, 태어난 아이들이 대부분 어려서 죽고, 메리라는 딸 하나만 살아남았다. 헨리 8세는 아이들이 유산, 조사(早死)하는 것이 형수와 결혼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당시 영국 왕은 아들만 될 수 있었고, 공주는 왕이 될 수 없는 전통으로 헨리는 아들 얻기를 몹시 희구하고 있었다. 그 즈음 헨리는 엔 볼레인이라는 궁녀와 사랑에 빠져 앤이 임신을 한다.

헨리는 앤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으나, 문제는 앤이 궁녀로 아들을 낳으면 사생아가 되고, 사생아는 왕이 될 수 없는 전통으로 고민한다. 헨리는 따라서 캐더린과 이혼 후 앤과 정식 결혼하여 앤의 아들을 적자(嫡子)로 왕통을 이어 받게 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당시 유럽 모든 나라가 가톨릭 국가였기에 왕실의 결혼은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에 따라 헨리는 캐더린과의 이혼과 앤과의 결혼 허락을 교황청에 청원했으나 거절되었다. 교황청은 아들이 없다는 이유는 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 했으나, 내막적으로는 강력한 국가였던 스페인의 눈치를 본 때문이었다.

- 성공회의 시작

교황청의 허락을 받지 못한 헨리 8세는 교황청과의 관계 단절을 선언하고, 1534년 수장령(Supremacy Act)을 선포한다. 이제부터 영국교회의 수장은 로마 교황이 아니고 국왕인 자신이 라 선언하였다. 여기서 영국교회(Church of England, Anglican Church)가 시작된다. 이 영국교회를 우리나라에서는 성공회라 부른다. 이렇게 과감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교회개혁의 불길을 붙인 후 20년 가까이 지나면서 교황권의 권위가 실추되고 개신교가 그 세력을 넓혀 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헨리는 영국의 고위 성직자, 수도원장, 대학총장들을 모아놓고 캐더린과의 이혼을 선언하고 앤과 결혼식을 올린다. 헨리와 영국국민들이 아들을 낳아 주기를 염원하는 가운데, 앤이 출산을 했는데 기대와 달리 딸을 낳고 말았다. 이 딸은 영국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엘리자베스 1세가 된다.(현재 영국왕은 엘리자베스 2세임). 실망한 헨리는 앤을 증오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증거도 없이 간통을 했다는 죄명을 뒤집어 씌워 참수형에 처하고 만다.(이 이야기가 영화 ‘1,000일의 앤’이다.)

헨리는 제인 세인무어와 세 번째 결혼하여 그렇게 원하던 아들을 얻는다. 이 아들이 에드워드이다. 그러나 제인은 산후 조리에 실패하여 에드워드 출산 후 곧 세상을 떠난다. 헨리는 그 후 결혼을 세 번이나 더 했지만 아들을 얻는데 실패하고 세상을 떠난다.

- 메리의 반란과 엘리자베스의 복원

헨리 8세가 사망하자 자연히 아들인 에드워드가 부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병약한 체질을 타고난 에드워드는 왕위에 오른 지 6년 만에 병사한다. 이렇게 되자 헨리 8세가 그렇게 걱정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헨리의 다른 아들이 없었고, 에드워드는 미혼이었으므로 아들이 없었다. 튜더 왕통을 이어갈 아들이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헨리 8세의 큰 딸 메리와 작은 딸 엘리자베스 둘 가운데 첫째 딸 메리가 동생 에드워드의 뒤를 이어 여자로 왕위에 오른다. 메리는 본디 스페인 가톨릭 국가 출신 어머니의 신앙 전통을 이어 받은 데다, 어머니 메리의 이혼에 동조한 개신교 쪽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세월을 보냈다. 메리는 왕위에 오르는 즉시 부왕 헨리 8세의 수장령을 폐지하고, 영국교회를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환원시켰다.

메리는 자기 어머니 이혼에 동의한 개신교 지도자들을 무수히 참살함으로 ‘피에 젖은 메리’(bloody Mary)라는 악명을 역사에 남겼다. 메리는 스페인 국왕 필립과의 결혼에 실패하고, 너무 피를 많이 흘리는 그녀에 등 돌린 영국 국민들의 냉대 속에 왕위에 오른 지 5년 만에 세상을 등진다. 자연히 왕통은 하나 남은 엘리자베스가 이어 받아 영국 역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긴다. 엘리자베스는 왕위에 오르는 즉시 언니 메리가 복원한 가톨릭과의 관계를 다시 단절하고, 부왕 헨리가 선포한 수장령을 재차 발하여 영국교회를 확립한다.

그러므로 영국교회는 영국 단독 교회로 성립되었다. 다시 말하면 가톨릭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신교회도 아니다. 왜냐하면 튜더 왕가의 왕통 문제로 교회가 생겨났기 때문에 개신교의 교리 개혁이 아니기에 가톨릭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성공회는 ‘예배’가 아니고 ‘미사’를 드린다. 그리고 성직자도 ‘목사’가 아니고 ‘신부’(father)라 부른다. 교리도 가톨릭의 그것을 많이 따른다. 그렇다고 가톨릭도 아닌 것은 신부들이 결혼을 하여 개신교의 성직자 결혼 제도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공회는 가톨릭교회도 개신교회도 아닌 제 3의 교회라 말해야 한다. 즉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중간 지점에 있는 교회라 보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