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의 결과

타락의 결과는 한 마디로 죽음이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떨어진 것이다. 이 죽음이라고 하는 말은 네 가지 영역에서의 분리, 부조화 및 불일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첫번 째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영적인 죽음”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영적 상태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말한다. 타락 전에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거나 피하거나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동산에 나타나시면 자연스럽게 그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며 함께 동산 안을 거닐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한 그림을 연상할 수 있다.

아담의 범죄는 그런 아름다운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 이상 상상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에덴 추방 이후, 그들에게 비록 “제사”라고 하는 방편을 통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두셨지만,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제물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고, 인간 쪽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하는 모습이다. 그나마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시면 가인의 경우와 같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았다.

타락 이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파기됨으로 사람이 영적 죽음의 상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 들어 가게 되었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왜 거듭남을 이야기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야기 하는지를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영적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뜻한다면, 중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뜻한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에 있던 사람의 의식 속에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 하는 심령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뜻한다. 살아 있는 영성이란 이런 속사람의 변화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성품이 언행 속에 반영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 째가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분리이다. 아담과 이브의 온전해 보였던 인간 관계는 선악과를 먹은 사건을 중심으로 결렬되었다. 이런 사실은 쉽게 창세기 앞 부분에 나타나는 아담과 이브,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살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죄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하나님의 질문들에 대한 아담의 대답은, 아담이 어떻게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과 이브에게 떠 넘기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조화는 비참하고도 잔인하게 깨어졌다.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가인의 이야기는 한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관계의 균형이 얼마나 무참하게 무너져 내렸나 하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성경은 타락 이후 인간의 역사가 그렇게 시작하여 어떻게 세계 역사를 미움과 증오, 살인과 전쟁, 변명과 모함, 불신과 불화로 채색해 왔는지에 대하여 증언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를 외치는 그 사람들 속에 진정한 평화는 없다. 오히려 평화를 갈구한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불화하며 살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반증 할 뿐이다. 이것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선포할 뿐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화목을 요구하는 지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세번 째가 만물로부터의 분리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저주는 인간 세계와 다른 피조물들의 세계에도 치명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사람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그들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 부자유함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도 탄식하며 고통한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라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몸의 구속함을 받는 날 그들도 죽고 썩는 것으로 부터 놓임을 받아 자유하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다 (로마서 8장20절-22절).

사람의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지음을 받는 피조 세계가 더 이상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 시켜 주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지진이나 해일, 가믐이나 홍수 같은 소위 자연 재해들이 일어 날지 모른다. 사람이 환경을 가꾸려고 노력하면 하는 것 만큼 환경은 상대적으로 열악해 지고 있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 일시적으로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쓰레기가 쌓이고 시간이 지나면 썩고 악취가 난다. 환경 보호를 외치는 인간의 노력에 반하여, 역설적으로 환경 파괴 현상이 뒤따른다. 그리스도의 구원 계획 속에 만물의 구속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신음하는 만물을 제자리로 돌려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마지막으로, 자신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속사람과 겉사람이 분리되는 소위 육체의 죽음을 통과하게 되기 전에도 사람은 내면적인 갈등 속에서 분리 현상을 경험하며 산다. 속사람과 겉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본성적 욕구의 불일치가 심령의 평안을 무너뜨리고 육체의 건강을 상하게 한다.

마음으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악은 행하며 산다. 육체의 욕구가 마음을 지배하여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게 만든다. 양심의 소리가 마음의 평안을 흔들어 놓지만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는 비이성적인 선택을 한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라고 하는 한 사람 속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의 법과 몸의 지체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법이 충돌하여 사람으로하여금 죄의 법 아래 무릅을 끓게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로마서 7장 18절-23절). “내 마음 나도 몰라”가 탄식처럼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온다.

사람이 구원자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락의 결과 사람이 영적으로 죽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사람과 만물과의 관계도, 심지어는 한 사람을 이루고 있는 속사람과 겉사람의 관계도 다 무너져 내린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이 거듭나면, 인간 세계 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에도 희망이 생긴다. 사람마다 심령의 참된 평안을 회복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깃든다면, 사람들은 불완전한 그대로 최선을 다하여 삶의 환경으로 주어진 자연을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몸의 구속을 바라보는 그 날을 고대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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