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2)

아담과 이브의 첫번째 범죄를 가르켜 통상 원죄라고 부른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면,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고 타락하여 에덴 동산에서 추방 당한 이후,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어떤 상태로 태어날까? 여기에는 몇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는,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죄 가운데 하나님의 저주 아래 태어난다는 입장이다.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타락 이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축복 속에
----------------------------------------
타락 이후: 하나님의 저주 아래, 죄 가운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 밖에 있는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언약 밖에 있다는 것은 태어날 때 하나님과 관계에 대한 인식이나 의식이 없다는 말이다.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죄가 사람의 모든 영역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하는 뜻이다. 죄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속사람은 계시로 주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기준으로 할 때, 하나님이 정하고 계신 것같이 바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겉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물려 받을 수 없는 유한한 상태, 즉,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기 전에는 행위에 기초한 언약 관계이기는 했지만,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킬 수도 있었다. 겉사람(몸)도 생명과 및 하나님이 양식으로 주신 모든 것을 통하여 죽지 않고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타락 후에는 겉사람이 죽지 않고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은 열외 없이 누구나 다 “정녕 죽으리라” (창세기 2장 17절) 고 말씀 하셨던 그 하나님의 저주 아래 태어난다. 이 세상에서는 속사람(영혼)만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면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이 길은 선행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이 믿음으로 사람은 영혼의 구속을 통하여 몸의 구속, 부활을 기대 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된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상태를 가르켜서 전적 타락이라고 부른다. 전적 타락이란 속사람의 기능이 부패하여 스스로의 지혜를 가지고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를 말함과 동시에 겉사람의 기능이 제한을 받아 혈과 육으로 되어진 몸의 현재 상태로서는 영원히 살 수 없게 된 것을 뜻한다. 물론 이 말이 타락 이후의 사람에게는 지, 정, 의의 기능이 말살되어 없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지, 정, 의의 기능이 작용하고 있다 할 지라도 한 인격체로서 속사람의 모든 기능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게 되기 전에는 스스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나갈 수 있는 지혜나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위의 도식을 빌리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분리선 아래 있는 사람이 스스로의 지혜나 능력으로 분리선 위의 하나님의 은혜나 축복 속으로 들어 갈 수 없다는 뜻이다.

둘째는,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로 태어난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서는 원죄로 말미암는 죄의 영향력을 부정하고, 사람은 누구나 다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주장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원하면 죄를 짓지 않고 선하게 살 수도 있고, 죄를 지으면서 악하게 살 수도 있다. 펠라기우스가 주장했다고 해서 이런 지론을 따르는 사람들을 펠라기안파라고 부른다. 이 주장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에는 도움이 되는 것같으나, 사람은 죄 가운데 잉태되고 죄 가운데 출생한다고 (시편 51편 5절) 하는 일반적인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된다. 또,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 죄를 짓지 않고 선하게 살 수 있다고 함으로서, 선한 행위에 기초한 자력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상은 아무도 선하게 살아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갓난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아무도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을 주장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의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로마서 5 장 12절-14절).

셋째가, 펠라기안파의 주장과 칼빈주의 주장의 중간 쯤되어 보이는 입장이다. 말 그대로, 아담과 이브의 첫 범죄를 원죄로 인정은 하지만, 타락 이후 그들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사람의 상태가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전적 타락의 상태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 하기 이전 상태와 같지는 않지만, 사람은 여전히 어느 정도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 할 수 있고, 원하면 선을 행할 수도 있을만큼 무죄하고 (innocent), 지혜롭고 능력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난다고 본다.

이와 유사한 죄관을 가지고 있는 신학은 로마 카톨릭이나 알미니안파에서도 발견된다. 로마 카톨릭은 외형적으로 펠라기안파나 세미펠레기안파의 죄관을 부정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어거스틴이나 칼빈주의적인 죄관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로마 카톨릭에서 믿음에 기초한 구원관보다 선행에 기초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알미니안파 중에서도 물론 웨슬레의 영향을 받은 알미니안파는 어느 정도 인간의 죄성에 대하여 칼빈주의적 측면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웨슬레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역사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바른 삶에 대하여 더 많이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른 삶에 대한 강조가 상대적으로 그로 하여금 전적 타락으로 말미암는 인간의 부패성에 대하여 매우 강조하게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성경이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 인간 상태에 대하여 전적 타락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믿느냐? 안믿느냐? 에 따라 믿는 사람의 구원관이 달라 질 수 있다. 칼빈주의적 전적 타락은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게 하지만, 펠라기안파의 흐름을 따라 간다면 구원은 어느 정도 자력으로 가능하거나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품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음 글: 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