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

창세기 2장과 3장 사이에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창세기 3 장은 아담과 이브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맺고 있던 언약 관계를 파기하게 되었는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타락이란 단순히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를 지었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이미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과 맺고 있던 언약 관계를 파기한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아담과 이브를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방법으로 자신들의 죄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회복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들어 갈 수 없는 상태로 떨어졌다.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했던 메시야,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열어 놓으신 유일하게 죄의 문제를 해결 받는 길이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히 살 수 있는, 떨어진 상태에서 떨어지기 이전 보다 훨씬 더 탁월한 상태로 들어 갈 수 있는 길이다.

일반적으로 타락이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하여 사전적인 정의를 말하자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나쁜 행실에 빠지는 것”(야후 사전)이라고 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타락이란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기 이전 상태에서 떨어져 죄를 범한 이후의 상태 속으로 들어 온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의 축복 가운데 살던 상태에서 떨어져,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저주와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면할 수 없는 상태로 들어 왔다는 뜻이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 당하여 땅을 갈며 살다 죽을 수 밖에 없도록 된 아담과 이브의 모습에서 그림처럼 그려지는 “타락”이라는 말의 개념을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인 아담과 이브를 자신의 형상을 따라 온전하게 지으셨다. 그들은 능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을 만큼 온전한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범죄 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존재들이었다. 신학적으로 이런 상태를 가르켜서 “포세 넌 페까레 엩 포세 페까레”라고 하는데, “죄를 안 지을 수도 있고, 지을 수도 있는” 상태라는 뜻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서 떨어져 죄 가운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unable not to sin) 상태에서 산다고 한다. 더 이상은 선택적으로 “죄를 안 지을 수도 있고, 지을 수도 있는” 상태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죄를 안 짓고는 살 수 없는 상태로 떨어져서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장 11절) 라고 한 말씀이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장 7절) 하신 말씀들을 보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또, 이것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다는 자력 구원을 말 할 수 없게 되었다. 같은 이유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죄 문제를 해결 해 주고,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언약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영생의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해 줄 구세주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예수가 구세주 (그리스도/메시야) 라고 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믿음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의인”으로 거듭나서, 이제는 이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에서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able not to sin) 상태로 들어 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단순히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그 은혜와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누리며 살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구속 받은 사람으로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산다고 하는 것이 “결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죄를 안 지을 수도 있고, 지을 수도 있는” 상태로 들어 온 것을 뜻 한다. 그러나, 이 상태가 타락하기 이전 아담의 상태와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겉 사람인 몸의 상태가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하기 이전, 그의 몸의 상태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몸으로는 영원히 살 수가 없고, 몸의 구속, 곧, 몸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육 간에 온전히 구속 받은 사람이 되기 전에는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산다.

이것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산다. 몸이 부활하여 온전한 구속이 이루어지면, 그 때 비로소 구속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넌 포세 페까레,” 즉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 속으로 들어 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에덴 동산으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을 위하여 예비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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