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먹을 양식이 없어 굶은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때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한 끼니를 때우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굶어 보지 않은 사람은 굶어 본 사람의 심정을 모를 것입니다. 없어서 굶는 사람은 오직 배고픔을 어떻게 면해 볼까 하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창조적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문화적 생할에 전혀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고 관심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신앙 생활조차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필요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을 때 백성들이 그 이적을 보고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을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보고 마음 속으로 예수님께서는 빵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임금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빵 문제는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최소한의 필요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지금도 지구상에 굶는 사람이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풍요를 누리는 현대에도 세계 도처에는 굶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배고픔은 이 세상에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남아돌아가는 식량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남아서 버리는 식량도 많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식량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왜 굶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에게 사랑이 없어서일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나누어 주는 분배 구조에 어떤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지금도 지구 어느 곳에서는 굶는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남아 돌아가는 식량을 국가적 차원에서 나누어 주고 싶어도 국가간의 정치적, 이념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다른 경제적 요인이 있기 때문에 남는 식량을 바다에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식량을 나누어 주지는 않습니다.

해마다 민간 차원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 벌어지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이 식량 문제에 있어서만은 이념, 종교, 정치적 이해관계, 민족성을 떠나 서로 국가적 차원에서 도울 수 있는 큰 마음을 가진 정치 지도자들이 각 나라에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굶주림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우리의 무관심, 국가적 무관심 때문에 세계 도처에 굶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