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하더라. (마 9:34)

이것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한 바리새인의 첫 비판이다.

그들의 관점에는 예수의 행하시는 기적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귀신의 왕을 의지하는 이로 보였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마가2:16)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 바리새인들은 그 겸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죄인을 향하신 사랑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마가2:24)

이것은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바리새인의 첫 판단이다.

그것은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의 경솔한 행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마태복음보다 훨씬 빠르게 겨우 2장에서부터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부딪혔다. 거의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은 비판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를 판단한 그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성경을 묵상하고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우리는 또한 그 말씀들을 익숙하게 알고 있다. 예수님을 대적했던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를. 문제는 복음서에서 제자들 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그 바리새인들을 성경상에서는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교회 현실에서는 모르는 것 같다.

역사 속에 부흥이 올 때에마다 슬프게도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판단받으신 것처럼 당연하게 먼저 비판을 받았었다. 웨일즈의 부흥이 오리라고 아무도 판단하지 못했을 때 오히려 사람들은 제시 펜 루이스를 비판하였다. 놀랍게도 제시 펜 루이스 여사의 비판받던 설교는 너무 십자가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반 로버츠가 자신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에 사로잡혀 그 안에 터질 것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고자 했을 때, 아무도 그것을 알아 챈 사람은 없었다. 그 교회의 목회자조차 마지 못해 사람이 적게 모이는 수요 강단을 내주었다. 그런데 그 날 부흥이 시작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00년 초기에 평양 대부흥이 왔을 때 많은 선교사들은 평양이 아니라 서울에 집중하고 있었고 소수의 선교사들이 평양으로 옮겨 갔다. 런던에 집중된 교계를 떠나 소외된 웨일즈에서 부흥이 왔던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부흥이 찾아왔었다.

예수께서 태어났다는 소식을 천사로부터 처음 들었던 이들은 그 당시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배하던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있던 예배자들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들에서 밤중에 양치던 목동들이었다.

오늘날 부흥을 미리 막고 있는 사탄의 요새 중에 하나는 부흥이 올 때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생각이다.

부흥의 절대 준비는 겸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