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우 박사(1906-1995)는 한국인 최초의 안과의사, 한글사랑운동가, 한글기계화운동가, 발명가, 사진작가였습니다.

그는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태어나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아 1938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안과병원(공안과의원)을 개원하고 또 한국콘택트렌즈연구소를 설립하였습니다.

해방 후 그는 곧 한글타자기 개발에 착수해 ‘공 박사가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별명한 공병우 한글타자기는 한국 최초의 미국 특허를 받아 냈습니다. 그 후 그는 한글학회 이사를 지내며, 점자 한글타자기, 한글 텔레타이프 등을 개발했고 이 일로 대통령표창, 외솔문화상 등 숱한 표창과 상,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그는 ‘못 사는 나라 사람들이 옷치장에 시간을 써서야 되겠느냐’며 한복을 입지 않고 양말 고무줄은 잘라 버렸으며, 이발소에선 5분 만에 머리를 깎았고, 약속 없이 찾아온 손님에게 약속하고 만나자며 돌려보내기도 했습니다. 또 드나들 때 불편하다며 집안 문지방을 모두 톱으로 썰어버렸고 방 안에 양변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평생 생일잔치 같은 걸 해 본 적이 없었고 자기 대에 조상의 제사를 없애 버렸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놀랄만한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유언 또한 특이합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내 장기는 전부 기증하고 시체는 해부학교실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대학에 제공한다.
2) 위와 같이 할 수 없을 때는 화장 또는 수장을 한다. 만약 법적으로 불가능할 때엔 가장 가까운 공동묘지에 매장하되 새 옷으로 갈아입히지 말고 입었던 옷 그대로 값이 싼 널에 넣어 최소면적의 땅에 매장한다.
3) 죽은 지 1개월 후에나 가족, 친척, 친구에게 사망 사실을 점차 알리되 매장이 되었을 경우엔 누구에게나 묘지의 소재지를 알리지 마라.

그래서 그의 죽음은 그가 작고한 지 이틀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고, 빈소도 없고, 장례식도 없고 묘지도 없었습니다.

1백년 전에 태어난 그의 사고와 행동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1965년 한국일보에서 선정한 한국의 고집쟁이 10명 중 제 6위에 뽑힌 것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신념을 따라 소신껏 살아간 사람입니다. 오늘날 신념없이 남의 눈치만 살피는 포퓰리즘(populism)이 판을 치는 세태에 본받아야 할 선각자란 생각이 듭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개정 히브리서 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