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서 흔히 여호와 하나님을 부를 때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유다의 하나님’이라고 안 하고, ‘요셉의 하나님’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 이들은 제단을 쌓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정체성이 ‘예배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예배는(Worship = worth + ship) 하나님의 가치를(worth)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예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녕 내게 하나님이시면, 우리의 즉각적이고도 온전한 반응은 ‘무릎 꿇음’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맞상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창조자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그분 앞에서 사실 우리는 호흡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습니다. (옛날에 직장 상사 앞에서 혹시라도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던 경험 없으세요?) 그분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모든 것 –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일날 내가 나가고 싶으면 별일 없으면 나가고, 혹시 바쁘면 더 중요한 일이 있으면 빠져도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는 내 마음가짐이 중요하고, 내 감정도 중요해서 – 마음가짐과 감정이 잘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는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러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예의를 차리려고 하는 좋은 마음, 자세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과 나를 동격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국무위원이 기분이 안 좋다고 대통령한테 오늘 쉰다고 말하면?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직장 쉰다고 하면 계속 쉬라고 하지 않겠어요?

혹시라도 제대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성도님들에게 정죄의 말로 들려지지 않기를 부탁 드립니다. 단지 주일날 빠지지 않고 나오니까 내가 예배를 잘 드린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잘못입니다. (예배, 기도 이런 말이 나오면 사실 누가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예배는 주일을 안 빠지는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주일 아침을 너머서 – 매일매일, 순간순간 우리의 삶의 자세와 태도에 파도처럼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에 – 가정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우리의 삶은 세상과 구별됩니다.

온갖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애쓰는 우리의 삶은 참 고달픕니다. 우리의 어깨에 달린 그 인생의 무게가 결코 만만하지도 가볍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또는 해결하고 나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은 내게 그렇게 만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기름 묻은 옷 그대로, 손에 물이 묻은 그대로, 아이들과 복닥복닥 하던 마음 그대로 – 그 자리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배할 때가 이때라고 합니다.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요4: 23)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갔기에,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하고의 관계를 온전하게 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밀려오는 그 선한 영향력으로 우리 앞의 문제들을 담대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이 예배라면 – 드릴 것이 별로 없으면 안 나가도 되겠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되면 당연히 안 나가겠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것을 받습니다.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사모하는 심령은 복된 심령입니다.

우리의 삶은 – 예배 – 에서 결정됩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가 어떤 예배인가에서, 내가 예배를 드리면서 어떤 마음가짐과 어떤 자세, 어떤 태도를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왔는가 에서 – 우리의 삶이 결정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형통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