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사람-하나님의 형상 (1)

창세기 1 장의 말씀을 따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 여섯 째 날 지으셨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의논하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 질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행하여 땅을 정복하고, 또, 공중에서, 땅 위에서, 물 속에서 호흡하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도록 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을 다른 피조물들과 어떻게 다르게 구별하여 지으셨는지, 또 그 사람들에게 어떤 것들을 기대하셨는지를 설명하신 것이다.

창세기 2 장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사람을 만드셨고, 어디에서 살게 하셨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여자를 만드셨고, 여자를 만드신 이유와 목적에 대하여 말씀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셨던 삶의 기준으로서의 첫번째 명령이 소개되어 있다.

물론 인간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과 2장 이외에도 성경 도처에 암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말씀들을 여기 저기 필요한 만큼 인용하여 언급은 하겠지만, 빠짐없이 다 열거 할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로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범주 내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먼저 다루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과 닮은 꼴이라는 말이다. “형상”이나 “모양”이라고 하는 말은 사물이나 어떤 특성이 유사함을 뜻한다. 예를 들어, 젊은 남녀들이 목이나 귀에 십자가를 걸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십자가들이 형상이고 모양이다. 그런 십자가들은 그 자체로서 십자가의 형태를 갖고 있지만, 그것들이 곧 본래의 십자가는 아니다. 본래의 십자가는 해골이라는 뜻을 가진 골고다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형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이 달리셨던 십자가 모양의 형틀이다. 역사적으로 정확한 십자가 형틀의 모양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아래 기둥이 긴 십자형의 형틀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가정 하에 지금의 십자가 형상이 보편화되었다.

예수님이 달리셨던 형틀로서의 십자가 - 장식용으로서의 십자가. 이 둘 사이의 차이가 본래의 십자가와 형상으로서의 십자가의 유사함과 거리감을 느끼게 해 준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비슷하게 닮은 것이 있다는 것도 보여주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얼마나 먼 거리에 놓여져 있는 존재인가도 보여준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만으로도, 통상적으로 말해지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듣기에 손색이 없다. 그만큼 사람은 다른 피조들과 다르다.

그렇다면, 성경은 사람의 어떤 면을 두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는가? 첫째가 도덕성에 관한 부분이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에 대한 설명을 할 때, 사도 바울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에베소서 4장 22절, 24절). 옛 사람은 욕심을 따라 예수 믿기 전 습관을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이다. 새 사람은 마음에 새로운 변화를 받아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을 따라”라고 하는 표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라고 하는 의미가 있는 말이다. “진리의 의와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어진 새 사람”이 직역에 가깝다. 병행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골로새서 3장 10절에서는 명백하게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라고 말씀한다.

에베소서 4 장은 진리에 속한 의와 거룩함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진리에 근거한 의와 거룩함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의 도덕성을 나타낸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인격체로서 도덕성을 지닌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뜻이다.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깔려 있는 도덕성은 날 때부터 주어져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도덕성은 타락으로 인하여 망가졌지만, 말살된 것은 아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일지라도 양심이 율법의 기능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모든 사람들 속에 남아 있는 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도덕성 때문이다.

둘째가 인격에 관한 부분이다. 골로새서 3 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형상을 인격체와 연관을 시킨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 하는데, 이 지식은 한 인격체로서 속사람이 갖고 있는 지, 정, 의의 세 요소 중 하나이다. 지식이 새로와 진다고 하는 것은 인격체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결단하는 기능이 하나님을 닮아 새롭게 변화되었다고 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을 떠나서, 사람이 인격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다.

이 사실은 신, 불신 간의 모든 사람들이 인격성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살 기가 왜 그렇게 힘든가 하는 것을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또, 이 말씀은, 믿음이 크거나 좋아서 다양한 영적 체험들이 있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지만, 기본적인 인간 관계에서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비인격적인 언행을 하는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의 주장하는 바에 대하여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생각하는 것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이라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로, 진실과 성실로 사람들을 대하시는 것처럼, 인격적이고 인간적이라야 “새 사람”이라는 말에 어울릴 것 같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몸으로 하는 모든 일에 관한 부분이다.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입으로 말하는 것, 손으로 일하는 것, 등등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여 주는 인간 활동들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며, 믿는 자들의 모든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읽는바, 혹은 선포되는 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친히 말씀하여 주신다.

우리가 몸으로 하는 활동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여 줄 수 있는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고 하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참으로 크다. 만일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 하는 바 모든 일을 통하여 구원 받은 인격자로서의 인간다움이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도덕성을 드러 낼 수 있다고 하면, 세상은 자연스럽게 믿는 사람들의 그런 삶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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