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월 리처드 닉슨이 미국의 공화당 예비선거 출마를 선언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니 딕(리처드의 애칭)이 또 나온데?" 1960년 존 F. 케네디에 패한 뒤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져 정계은퇴 선언을 했던 닉슨 아닌가. 약속을 깨고 나왔으니 유권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 무렵 닉슨에게 붙여진 별명은 '교활한 딕'(the Tricky Dick). 그동안 꼭꼭 숨어있다가 경쟁후보들의 면면이 약체로 평가되자 이 틈을 타 대권에 도전한 것이 밉게 보인 때문이다.

닉슨에게 가장 시급한 건 이미지 반전이었다. 대중에게 친근감을 주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던 것. 이웃집 아줌마와 동네 꼬마들을 TV 홍보물에 출연시켜 '우리는 딕을 사랑해요'를 외치게 했다.

이에 제동을 건 인물은 20대 후반의 미디어 전략가 로저 에일리스(현 폭스 TV 뉴스 담당 CEO). "당장 집어 치우세요. 이걸 내보낸다고 이미지가 바뀌겠어요. 오히려 닉슨은 정말 교활한 녀석이라고 욕만 먹게 됩니다."

유권자에게 친구처럼 다가서는 것을 포기한 대신 닉슨의 강점을 부각시키는 정공법을 쓰기로 했다. 결단력과 명석한 두뇌, 근면과 인내심 등을 내세워 상대 후보와의 차별화를 시도한 것.

그래서 나온 캠페인 커머셜이 바로 '경기장의 투사'(the Man in the Arena)다. 대통령이 되면 투사 처럼 싸우겠다는 다부진 결의다. 베트남 전쟁을 서둘러 끝내 허물어진 국가의 품격을 곧추 세우고 경제를 되살려 내겠다는 것이다.

'교활한 딕'에서 '경기장의 투사'로 부활한 닉슨. 이 게 표심을 움직였던 모양이다. '맘에 썩 들진 않지만 그래도 요즘같은 난국에선 투사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심리가 유권자들 사이에 급속도로 번졌다.

민주당 쪽이 아무리 그의 비리를 터트려도 한번 올라간 지지율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이듬해 치러진 선거에서 닉슨은 믿기지 않는 승리를 엮어낸다.

알고 보면 '경기장의 투사'는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작품이다. 1910년 어느 대학 강연에서 한 말이 널리 회자돼 닉슨 측이 인용한 것 뿐이다.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먼지와 땀 그리고 피로 범벅이 된 채 용맹스럽게 싸우는 투사. 리더의 덕목은 강인함과 열정 그리고 헌신이라며 이를 투사에 비유한 것이다.

닉슨이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휘말려 사임하는 바람에 이미지가 다소 빛을 바랬지만 그래도 역대 공화당 후보들은 '경기장의 투사'를 캠페인에 즐겨 써 대권을 잡을 수 있었다.

2011년 신묘년 새해가 열리면서 한국의 대권 레이스가 서서히 불이 붙을 기세다. 여권에서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비롯해 오세훈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지사,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 등이, 야권에서는 손학규 민주당 대표, 정동영 전 대표, 유시민 전 의원, 한명숙 전 총리 등이 '몸 풀기'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표는 작년 말 대선 출정식을 방불케 하는 '한국형 복지국가' 구상을 담은 사회보장기본법 전부 개정안 공청회를 연 데 이어, 새해에는 과학기술·재정·교육 분야 등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정책행보'를 구체화할 것으로 보인다.

대선이란 '경기장'에 후보로 나선 '투사'는 현재 8명. 이들 중 박근혜 전 대표가 일단 유리한 입지를 구축해놨다.

그러나 앞으로 레이스가 본격화되면 서로 헐뜯기에 '올인'할 것이 틀림없다. 유권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루즈벨트의 말대로 경기장 투사들의 '열정'이지 진흙탕 싸움의 '빈정'은 아닐 것이다.

후보들이 계속 이전투구의 싸움을 벌인다면 유권자들은 최상이 아닌 차선의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이렇게 당선된 대통령은 5년 임기를 얼마나 고단하게 보낼지 불보듯 뻔하다.

'경기장의 투사'가 돼 정책으로 승부를 겨루는 후보들. 국민들은 이런 장면을 가장 보고 싶어할 것이다.

박현일 기자, uko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