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자들이요 주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얻게 되었다. 복음의 진수를 전하는 것이 선교의 핵심이다. 그런데도 마치 교파를 전하는 것이 사명인 양 열심을 내는 것을 보노라면 우리의 선교는 마치 예수님보다 교파가 더 중요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교파나 교단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도구이지 목적은 아니다.

선교의 교파 연장주의란 한국의 교파를 선교지에 심어 놓으려는 노력으로 한국적 교단의 확장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교단확장 주의에 열을 올리는 추세이다. 각 교단별로 한인교회를 각 나라에 세우는 일, 선교지에 자신의 교단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교단을 세우는 것이 우리 선교의 특징이다.

선교지는 합동교단도 통합교단도 없다. 장로교만 있을 뿐이다. 어떤 나라는 침례교가 성하고 어떤 나라는 C&MA 교단이 성하다. 어떤 곳에는 성공회나 감리교가 성하다. 어쨌든 그 나라의 선교 역사에서 어떤 교단이 먼저 자리를 잡고 효과적으로 선교사역을 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장자 교단이 되곤 한다. 우리나라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1885년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장로교의 정책이나 교리적 정서가 우리 문화와 맞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이 큰 역할을 한 것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문화에 뿌리를 내린 교단의 특성이 있듯이 나라마다 그들의 문화에 맞는 교단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동일하게 그 교단에 핵심이 되고 있다.

이러한 교파주의 선교는 선교사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교회나 교단이 선교지의 상항을 고려하지 않고 뒤에서 강하게 밀고 있다는 것이다. 선교지에는 나라 나름대로 그 토양에 맞는 교단들이 있고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얼마든지 있다. 저들과 손을 잡고 일을 하면 얼마든지 복음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텐데도 그 어려운 교단 설립에 뛰어들지만 세워진 교단의 영세성을 면치 못한다.

교단을 세우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선교사들이 세워 놓은 교회들에게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갈 데가 없다는 것이다. 조직적 측면에서는 이해가 되지만 가능하다면 그 나라에 자리를 잡고 있는 교단에서 관리할 수 있도록 협정 내지는 관계를 설정하면 가능하리라 본다.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에만 전념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교단적 체계는 그들의 몫이라 생각하고 현지인들에게 맡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 시대 선교에서는 교단 설립의 시대는 지났다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지역을 분할하여 복음을 전했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 박사의 '한국 개신교 수용사'(이은무, 선교사들의 협력 , '21세기를 향한 한국 선교의 비전', IVP, 1996, p.86.)에 보면, 한국 선교를 위해 온 각국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지역을 분할하여 포교를 했다. 1889년에 호주 장로교회가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했고, 영국 성공회와 미국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는 남부지역의 포교활동을 맡았고, 캐나다 장로교회는 평양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고, 1890년부터 미국 남감리교회는 적극적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포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생각은 교파적 관심보다는 구령운동에 관심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한국 복음화를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선교는 왜 이런 좋은 전통을 전수받지 못하고 교파 경쟁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