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이전: 하나님의 뜻 (2)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싯점에 대하여는 인간의 타락을 정점으로 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타락 전 예정설과 타락 후 예정설이 그것이다.

타락 전 예정설은 하나님의 선택적 주권을 강조한다. 로마서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의 원함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강조 하면서 출애굽 당시 바로의 완악한 처신을 예로 든다. 바로의 그런 완악한 처신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는 것을 강조 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토기장의 권한에 대한 예를 들어 바로를 그렇게 천한 일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결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정당하다고 하는 것을 설명한다. 토기장이에게는 똑같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하게 사용할 그릇을, 다른 하나는 천하게 사용 할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한 덩어리 흙에서 나온 그릇이라는 것이 요점이다. 타락 전 예정설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의 상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상태는 똑같다. 사람의 선재하는 상태가 하나님의 선택적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귀한 일을 위하여 사용되어지고, 어떤 사람은 천한 일을 위하여 사용 된다. 물론 여기서 귀하게 사용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천하게 사용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드러내기 위하여 바로와 같이 완악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똑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구원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면서 산다. 멸망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자초하면서 산다. 어느 쪽으로 택함을 받았다고 믿고 싶은가? 구원으로 택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한량없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락 후 예정설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우러나는 선의적 주권을 강조한다. 예레미야서 18장에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베푸실 긍휼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토기장의의 집으로 보낸 장면이 나온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 토기장이의 집에서 본 것은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 그릇이 망가졌을 때, 그 그릇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토기장이 보기에 좋도록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는 것이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예레미야 18:4). 이어서 선지자는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예레미야 18:6) 라고 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한다.

타락 후 예정설의 요점은 토기장이가 파상된 그릇으로 새로운 그릇을 만들 수 있다는 데 있다. 토기장이가 파상된 그릇을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선한 의도를 따라 다른 그릇을 만들었다. 이 논리를 타락한 인간 세계에 적용하면, 첫 사람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 그의 공의로운 성품을 따라 파상한 그릇 같은 아담과 이브를 버리고, 새로 시작 할 수도 있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이라는 은총의 길을 통하여 범죄한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 지음을 받아 거듭난 새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하나님께서 첫 사람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과 이브가 범죄한 것을 보시고 비로소 범죄한 인생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시기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 타락 후 예정설이다.

타락 전 예정설이 더 성경적인가? 타락 후 예정설이 더 성경적인가? 에 대해서는 같은 보수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의견이 나누어져 있다. 칼빈이나 루터는 타락 전 예정설을 주장했고, 어거스틴이나 워필드 같은 신학자는 타락 후 예정설을 주장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두 가지 입장을 절묘하게 배합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다고 한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로마서 9장의 말씀이나 에베소서 1장 4, 5절의 말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라고 하신 말씀을 보아도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택함이 “창세 전에” 라고 한 것은 시간적으로 타락 전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한 말씀은 인간의 타락을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정설에 관한 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싯점에 관한 답을 얻는 것 자체가 아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첫째로,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인간을 짓기 전부터, 인간이 걸어 갈 길을 미리 아시면서도 그것을 허락 하시고, 그 타락한 인생들 중에 얼마를 택하셔서 구원하실 것을 미리 결정하시고,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준비해 두셨었다고 하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둘째는, 지금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살게 된 것도 믿음의 주체인 내가 다른 사람보더 더 나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선의적 선택의 결과라고 하는 것을 믿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태도로 최선을 다 하여 하루 하루를 살아 가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들, 십자가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거듭난 새 사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사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영적 택함의 역학 관계를 명료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찌라도, 실상은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 전부터 그들을 구원하기로 예정 하셨기 때문에 그런 구별된 삶이 가능한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은 처음부터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오직 택함을 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이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택함의 진리를 마음 속 깊이 깨닫게 된다고 하면, 어느 누구도 이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하여 믿음을 잃어 버리거나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믿는 자들의 구원은 처음부터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여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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