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7일,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전쟁준비가 거의 없었던 미국은 참담한 상황이었다. 국민들도 군에 대한 신뢰를 접었다. 군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다.

패배주의의 먹구름이 온통 미국사회를 뒤덮고 있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군 최고통수권자로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해 12월 말 루스벨트는 일본 본토 공습을 감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상황으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결국 자살특공대를 조직하는 수밖에 없었다.

항공모함을 이용한 일본 본토 공습계획이 비밀리에 입안됐다. 그러나 해군 함재기는 항속거리가 짧아 작전투입이 어려웠다. 결국 육군항공대(당시엔 공군이 육군 소속이었다)가 보유한 B-25 전폭기가 공격 기종으로 채택됐다. B-25를 항공모함에 탑재해 일본 공격에 나선다는 작전이었다.

플로리다주의 한 공군기지에서 3주간 항공모함 이륙 훈련이 실시됐다. B-25는 그러나 육상에 기지를 둔 비행기여서 항공모함을 한번 이륙하면 되돌아올 수 없었다. 작전이 끝나면 가까운 중국의 비행장에 착륙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무모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어서 조종사를 비롯한 모든 병력은 자원자들로 충당했다.

훈련을 마친 B-25 전폭기 16대가 항공모함 호넷에 실렸다. 편대장은 제임스 '지미' 두리틀(1896~1993) 중령. MIT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엘리트 조종사였다.

B-25 '자살특공' 편대가 항공모함을 이륙한 때는 1942년 4월 18일. 전폭기 편대가 도쿄 상공에 체류한 시간은 꼭 30초였다. 폭탄을 투하하고는 곧바로 동지나해(East China Sea)로 향했다.

하지만 연료부족과 기상악화로 비행기는 중국 땅에 비상동체 착륙하거나 낙하산을 이용, 탈출을 시도했다. 이중 10여명은 일본군에 붙잡혀 대부분 처형됐다.

폭격의 효과는 미미했지만 당시 승전에 도취돼 있던 일본인들은 엄청난 심리적 쇼크를 받았다. 국민들은 군부를 믿지 못하게 됐고 군인들도 전의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미군 조종사들의 탈출을 도왔다는 이유로 25만명이 넘는 중국 양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군의 도쿄 공습에 놀란 일본의 연합함대는 2개월 후인 6월 초 '미드웨이 대해전'을 기획,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역습에 말려들어 패하고 말았다. 이 때부터 일본은 패망의 길을 걷게 됐다.

전쟁사에 '두리틀의 도쿄 30초'(Thirty Seconds over Tokyo)로 기록된 미국의 공습은 일본의 전쟁의지를 꺾어놓은 심리전의 백미로 꼽힌다.

북한군의 연평도 공격으로 한반도가 위기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북한이 3차포격을 감행하면 오산기지에서 전투기가 발진, 북한의 해안포대에 미사일 공격을 퍼부어 박살내려 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주민들은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데도 김씨 3대세습 체제를 굳히기 위해 무력도발과 핵개발에 광분하고 있는 북한의 지도층. 이들 호전적 집단에 겁을 주기 위해선 공습이 가장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폭격은 하지 않더라도 우리 전투기가 평양상공에 30초만 떠 있더라도 북한은 극도의 공포에 휘말려 체제 붕괴가 가속화될 것 같다. 2차세계대전 당시 '두리틀의 30초 공습'이 그 효과를 역사로 입증해 주고 있다.

박현일 기자, uko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