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여러 모양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포스트모더니즘 현상과 인터넷 현상을 대표적이라 말하고 싶다.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은 어쩔 수 없이 개인이기주의에 터하기에 태생적 현상이라 할 수 있고, 인터넷 현상은 산업 기계 문명의 결과이기에 후천적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생적이라 함은 그대로 봐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고, 후천적이라 함은 보다 강한 것이 있으면 바꾸어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특징은 누가 뭐라 해도 개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일 것이다. 근대주의가 산업과 문명 발전의 이름으로 국가주의와 건물-조직사회를 추구할 때에 개체적 존재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기존 조직과 사회에 대한 해체적 성격을 가지고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성인 것이다.
또 인터넷 시대의 대표적 특성은 컴퓨터 문화로 인한 비인격적이며 익명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컴퓨터라는 기계를 통하여 다른 사람과 상관이 없이 자신의 상상의 세계를 끝없이 표출하는 것이다. 도덕윤리성을 갖춘 의견들이 아닌 욕망적이고 감정적인 느낌을 이름도 없이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전화로 말을 할 때의 목소리를 통한 느낌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주고받는 대화를 통한 인격적이고 정서적인 교류가 전혀 배제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컴퓨터의 카피 문화, 인터넷의 익명성 문화는 존재의 가벼움을 극대화 시키는 인간성 말살기(機)일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좋은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거부하고 세상을 등진채로 꼭꼭 숨어 살 수만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우선, 개인적 이기성을 대적하여 싸우지 말 것이다. 싸운다고 하여 이기지도 못하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에너지만 소비할 뿐이다. 그것을 없애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반발할 뿐이니, 차라리 친구로 삼고, 서로에게 필요하고 서로에게 충족 될 수 있도록 필요충분조건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win-win 방식인 것이다.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 것이다. 어렵다하면 더 어려워지는 법이다.
다음, 인터넷의 비인격적 익명성은 사각지대(Blind Side)와 같다. 사각지대이기에 은총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즉 나의 의지가 아닌 제 삼자의 개입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자신의 자아만이 숨어 있는 곳이다. 이곳은 누구도 접근하기 어렵고 상관하기 어려운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공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달리 생각하면, 지극히 개인적이기에 역설적으로 지극히 인격적일 수 있는 것이다. 즉 악플과 같은 일을 저지른 후에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돌아볼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처음 한 두 번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으로 쾌락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것이 반복되는 가운데 스스로 자신의 인격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은 인간은 도덕적 존재라는 나의 확신에서 하는 말이다.
사람은 악으로 인하여 자괴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거기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선한 갈망도 끓어오른다고 믿는다. 이것은 마치 바위 밑에서 동면을 하던 두꺼비가 때가 되어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그것은 두꺼비의 지혜나 본능이 아니다. 봄의 은총의 기운이 그에게 느껴졌기 때문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특징은 누가 뭐라 해도 개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일 것이다. 근대주의가 산업과 문명 발전의 이름으로 국가주의와 건물-조직사회를 추구할 때에 개체적 존재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기존 조직과 사회에 대한 해체적 성격을 가지고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성인 것이다.
또 인터넷 시대의 대표적 특성은 컴퓨터 문화로 인한 비인격적이며 익명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컴퓨터라는 기계를 통하여 다른 사람과 상관이 없이 자신의 상상의 세계를 끝없이 표출하는 것이다. 도덕윤리성을 갖춘 의견들이 아닌 욕망적이고 감정적인 느낌을 이름도 없이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전화로 말을 할 때의 목소리를 통한 느낌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주고받는 대화를 통한 인격적이고 정서적인 교류가 전혀 배제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컴퓨터의 카피 문화, 인터넷의 익명성 문화는 존재의 가벼움을 극대화 시키는 인간성 말살기(機)일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좋은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거부하고 세상을 등진채로 꼭꼭 숨어 살 수만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우선, 개인적 이기성을 대적하여 싸우지 말 것이다. 싸운다고 하여 이기지도 못하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에너지만 소비할 뿐이다. 그것을 없애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반발할 뿐이니, 차라리 친구로 삼고, 서로에게 필요하고 서로에게 충족 될 수 있도록 필요충분조건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win-win 방식인 것이다.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 것이다. 어렵다하면 더 어려워지는 법이다.
다음, 인터넷의 비인격적 익명성은 사각지대(Blind Side)와 같다. 사각지대이기에 은총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즉 나의 의지가 아닌 제 삼자의 개입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자신의 자아만이 숨어 있는 곳이다. 이곳은 누구도 접근하기 어렵고 상관하기 어려운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공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달리 생각하면, 지극히 개인적이기에 역설적으로 지극히 인격적일 수 있는 것이다. 즉 악플과 같은 일을 저지른 후에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돌아볼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처음 한 두 번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으로 쾌락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것이 반복되는 가운데 스스로 자신의 인격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은 인간은 도덕적 존재라는 나의 확신에서 하는 말이다.
사람은 악으로 인하여 자괴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거기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선한 갈망도 끓어오른다고 믿는다. 이것은 마치 바위 밑에서 동면을 하던 두꺼비가 때가 되어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그것은 두꺼비의 지혜나 본능이 아니다. 봄의 은총의 기운이 그에게 느껴졌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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