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새벽예배. 한국교회 부흥의 첫 번째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척교회부터 대형교회에 이르기까지 성도들의 신앙성숙과 더불어 부흥을 소망하는 곳에는 새벽예배의 열기가 더욱 뜨겁다. 이에 기독일보는 남가주 한인교회들의 새벽 설교를 집중 조명하여 새벽제단에서만 내리는 특별한 은혜를 나누고 개교회를 넘어 지역과 미주 전역의 부흥을 함께 소망하고자 한다.

물댄동산교회(담임 최천식 목사)는 교회의 부흥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지역과 남가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가 매일아침 드려지고 있다. 작지만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가 멈추지 않기에 물댄동산교회의 새벽예배의 설교도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위로자와 격려자가 되기를 권면했다. 비판과 정죄가 넘쳐나는 이 시대의 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우리들도 마땅히 사랑과 겸손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한 영혼이라도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4장 36~37절>

19세기 전설적인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 화가에게 어느 노인이 스케치북을 가져와서 자신의 그림 평가해 달라고 합니다. 그림을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림에 대한 소질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또 다른 스케치북을 꺼내서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림에 대한 소질이 뛰어난 그림이었습니다. 화가는 누가 그린 그림이냐고 물었고, 노인은 대답했습니다. 40년 전에 그 노인이 그린 그림이라고 말입니다.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었지만 그 누구도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해 준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그림을 포기하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누군가 칭찬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뛰어난 재능을 포기하고 모른 채 평범한 인생을 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릴 때 격려와 칭찬의 말을 들었다면 그의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칭찬이란 무엇입니까? 좋은 점이나 착한 점을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담긴 한마디가 사람의 운명을 가를 수 있지요. 인생을 살다보면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은 ‘지하실형’입니다.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다른 종류의 사람은 ‘발코니형’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힘이 나고 업(up)되고 용기가 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비판과 정죄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포용하고 서로 세워지고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 누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네가 그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멋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별명이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격려의 아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이름이 요셉인데 구브로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습니다. 레위족속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바나바가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을까요? 이름의 뜻처럼 그는 격려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자 혹은 격려자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바나바는 자기의 필요보다는 남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33~34절 보시면 예루살렘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몰려오는 사람 가운데 부자도 있고 가난한자도 있고 과부와 고아도 있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니 많은 인간적인 필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헌금을 하고 자신의 소유를 내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바나바가 행한 행실을 기록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구제의 문제 발생하기도 했으며, 그래서 집사들을 선택하고 사도들은 말씀사역에 집중하도록 합니다. 그 가운데 바나바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며 채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밭을 팔아서 내어 놓았습니다. 바나바에게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아서 사도의 발 앞에 둡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기가 먼저 좋은 것을 취하고 자신만 아는 사람이 있으며, 자기 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를 통해 세상은 따뜻하고 아름다워집니다.

미국은 청교도의 정신으로 세워졌고 그 정신으로 많은 사람들을 섬겼기 때문에 많은 축복을 받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남을 돕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크레딧을 쌓는 일입니다. 이왕이면 도울 때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도우십시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 교회는 훌륭한 평신도가 많았던 교회입니다. 바나바가 다소에 있는 사울을 찾아서 그의 손을 붙잡고 안디옥교회를 함께 섬기자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 없이도 목회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데려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바울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바나바는 바울의 은사, 그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섬긴 안디옥교회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칭찬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바나바와 바울은 사도행전 12장에서 마가의 일로 큰 논쟁을 벌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려가자고 했지만 바울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1차 전도여행 중에 돌아가 버렸던 마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일에 ‘마가복음’이라는 귀한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고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짓밟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감싸주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사람을 이 시대는 필요로 합니다. 우리 모두가 바나바처럼 진정한 격려의 아들로서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