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한국에서 입양되어 온 청년이 있었습니다. 미국인 백인 양부모 밑에서 아주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습니다. 대학도 잘 마쳤고, 현재는 열심히 군복무 중인 준수한 청년입니다. 하지만, 그는 무척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에서 입양되어 온 또래의 친구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다른 청년들과는 달리 유독 이 청년만 자신의 “뿌리” 문제에 대해서 아주 민감했고, 깊은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가끔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자신은 자기를 포기한 생모(生母)를 증오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급하게 한국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생모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던 이 청년이 갑자기 한국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저에게 자신의 생모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주소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수소문해서 찾아가 보았더니, 참 가슴 아픈 사연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복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홀로 남은 젊은 어머니도 폐결핵에 걸려 아기였던 그를 돌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의지할 친척도 없었던 어린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며 태어난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는 그를 “홀트 입양기관”을 통해 미국으로 입양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인천에 있는 작은 폐결핵 요양소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먼 친척 되신다는 아주머니를 통해 듣는 이 씁쓸한 이야기는 “제가 마치 어느 비극적인 영화의 중심 속에 휩쓸려 들어와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그 가엾은 젊은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되뇐 이름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청년의 이름입니다. 얼마나 사무치도록 그리운 이름이었을까요? “혹시, 안 좋은 직업에 종사하는 여인이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던 염려는 기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을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옮길 수 있었던 저는 미국에서 다시 만난 그에게 “너는 참 훌륭한 어머니를 둘이나 가졌다”고 축복해 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이를 악물고 혈육의 정을 “포기해 주신 어머니”와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진 동양의 아이를 자신의 소생으로 “받아 들여 주신 어머니” 둘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건강한 그가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저와 같은 염려로 수많은 시간을 가슴 조렸을 그가 그날 그 동안 참고 참았던 굵은 눈물을 참으로 오랫동안 흘렸습니다. 젊은 아이가 그렇게도 열정을 다해 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왔습니다. 아직도 떨어뜨릴 눈물이 남아 있었는지 주차장으로 나아가 세워진 차에 시동을 걸고 멍하니 숨죽여 울던 그의 슬픈 눈망울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는 이 사건이 있은 이후로 아주 많이 변했습니다. 포근하고 살가운 청년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어김없이 자기를 “버려주신 사랑하는 어머니”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감사를 했습니다. 이 가을 동화 같은 이야기가 10년 전, 이맘 때 쯤에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해마다 가을되면 그를 떠올리게 되는 이유입니다. 감사의 계절 11월입니다. 넓은 마음으로 생각을 바꾸어 보면, 감사하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여, 바울 사도는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 5: 18)고 우리들을 향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진리가 우리의 현실로 느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