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이전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은 “인격체”라고 하는 말이다.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각각 지, 정, 의, 곧,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는 인격체로서 자유롭게 독립된 활동을 한다. 각 독립된 인격체로서 삼위의 활동들은 다양하지만, 한 하나님으로서의 활동이며, 삼위의 다양한 활동들은 한 하나님의 활동으로서의 통일성을 갖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를 묘사하는 말이 성부, 성자, 성령이다. 성부를 묘사하는 말은 “스스로 있는 자” 이다 (출애굽기 3:14). 성자를 묘사하는 말은 “성부가 낳은 자 (독생하신 하나님)” 이다 (요한복음 1:18). 성령을 묘사하는 말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자 (보냄을 받은 자)” 이다 (요한복음 15:26, 16:7). 표현상, “스스로 있는자,” “낳은 자,” “나온 자”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각위가 존재하게 된 순서를 말하거나, 하나님이 스스로 진화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 위의 독특하고도 유일한 관계를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언어로 묘사한 것이다. 이 독특한 관계에 대한 묘사는 구속사라고 하는 큰 틀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해 주신 순서라고 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이런 묘사들은 각 위의 우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구원사라고 하는 역사의 지평 위에 인간의 구속과 맞물려 나타나게 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양한 활동들을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혹자들은 삼위일체를 설명함에 있어서 양태론의 영향을 받아 삼위의 하시는 일을 구분할 때, 성부는 창조를, 성자는 구속을, 성령은 구속의 적용을 한다고 말함으로서, 삼위의 활동이 각 시대에 제한을 받고 있는 것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실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신학을 반영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 성경의 창세기 1장 2절 번역을 보면, 히브리어의 “영”이라는 말이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하나님의 신”을 “하나님의 바람”이라고 번역하고, 친절하게, 성령이 창조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부언 설명을 붙여 놓았다. 그런데, 구약을 해석함에 있어서 유대주의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창세기 1장 2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은 성령이 아니라고 주장 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에 관여한 것을 부인한다. 또, 사도행전 이장에 나오는 오순절 사건의 현상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현재 이 시대가 성령 시대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능력있는 믿음생활을 말할 때 성령의 나타남에 수반되었던 현상에 치우친 신앙생활을 강조 하다보니, 좋은 신앙생활이란 어떤 영적 현상을 추구하고 경험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한 사람 성도로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으로는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이 말은 마치 현대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구속의 적용”이라는 차원에서 성령의 활동만 있고, 성부나 성자의 활동은 전혀 없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삼위의 활동에 대한 이런 해석은 성경적으로 건전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편식을 하게 하는 것과 같은 위험이 있다.

물론, 성경은 삼위의 나타남이 구속사의 흐름을 따라 때로는 성부가, 때로는 성자가, 때로는 성령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부가 전면에 나타나고 있을 때에는 성자나 성령의 역사가 없었고, 성자가 전면에 나타나고 있을 때에는 성부나 성령의 역사가 없었으며, 성령이 전면에 나타나고 있을 때에는 성부나 성자의 역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시대에 걸쳐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시면서 한 하나님으로서 창조에도, 구속에도, 구속의 적용에도 한결같이 동일한 보조로 참여하고 계신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믿음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이마암았다고 하는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믿음생활을 삼위 중 어느 한 위에 더 의존하여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선입견이나 한 위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도 단순히 성령의 역사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을 수 있도록 사람의 마음을 이끌어 주시는 성부의 역사도 있어야 되는 것이고 (요한복음 6:44),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시는 주님의 역사도 있어야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 16:14).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는 일에만 삼위일체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 성화되어 한 사람 온전한 성도로 성숙해 가는 모든 일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공히 관여하고 계신다. 성화가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부인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성화가 성령의 전유물만은 아닌 것이다. 바람직한 성화를 말하려면, “자라나게” 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고린도전서 3:7), 믿는 자들을 자라게 만들어 주는 “신령한 젖” (베드로전서 2:2), 하나님의 말씀, 곧, 성육신하셨던 성자의 사역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각 위가 하시는 사역에 대한 바른 성경적인 이해는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삼위 중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잡힌 건강한 믿음 생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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