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후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에 함락되었고, 73년 맛사다를 끝으로 유대 땅은 로마의 강력한 지배하에 들어갔다. 많은 유대인들이 죽었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그리고 주후 135년 2차 유대인 반란 때에는 예루살렘은 철저히 황폐되었으며 유대인은 단 한 명도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 없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유대 땅에서 추방되었으며 영토와 주권 그리고 매일 사용하던 언어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유대인이란 신분 뿐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분 때문에 인류 역사에서 특히 19-20세기에 많은 목숨을 잃었다.

유대인이란 신분만 남은 채 그들에게는 땅도 없고, 언어도 없이 2천 년을 흩어져 살다가 현대 유대인 국가가 건설된 것은 1948년 5월 14일이다. 그러나 현대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1881년 이후이다.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반 유대주의를 피하여 팔레스틴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1897년 데오도르 헤르쩰 (Deodor Herzel)에 의해 처음 시오니즘 기구가 결성되었고 그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 건설에 대한 아이디어를 심어주었다. 이것을 시오니즘이라 부른다. 시온이란 고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다. 데오도르 헤르쩰은 “만약 이룰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는 말을 슬로건으로 삼았다. 헤르쩰의 이 말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국가 건설에 대한 꿈을 심어주었으며 그것이 현실이 되도록 노력하게 하였다.

▶벤 여후다가 사전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이다
시오니즘 기구가 결성되고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지 반 세기가 지난 1948년 현대 이스라엘 국가가 창설되었다. 당시 주변 아랍 국가들의 반대와 나찌의 유대인 학살로 수 많은 유대인들이 살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2천년 만에 새로운 국가가 창설된 것이다. 유대인에 의한, 유대인 국가가 과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살던 땅에 현대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이제 유대인들은 그들의 땅을 가진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이 나라의 국민이 되었고 팔레스틴은 그들의 영토가 되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언어가 필요하였다. 당시 히브리어는 회당에서 토라와 기도서를 읽고 의식을 진행하는 언어로만 사용되었지 실재 생활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죽은 언어였다. 그런데 죽었던 언어가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여기에는 벤 여후다의 절대적인 헌신과 수고가 있었다.

언어는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벤 여후다는 러시아 영토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본래 그의 부모는 벤 여후다가 랍비가 되는 것을 원하여 그를 율법학교인 여쉬바 (Yeshiva)로 보내어 그곳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벤 여후다는 언어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벤 여후다는 12살까지 여쉬바에서 히브리어와 유대 전통을, 그리고 라트비아 (Latvia)의 뒤나부르그 (Dünaburg)에서 공부했다. 여기에서 벤 여후다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시오니즘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 감정이 싹텄고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한 유대인 동족들에게 히브리어로 말하고 쓸 수 있는 유대인 국가를 생각한 것이다. 이제 20살이 된 벤 여후다는 유럽에 흩어져 살던 70만 명의 이디쉬를 말하는 유대인들이 유럽을 떠나 팔레스틴에서 히브리어를 말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꾼 것이다.

벤 여후다는 히브리어가 한때 유대인의 언어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때 그의 조상들은 히브리어로 농담했고, 가축을 사고 팔았으며, 법정에서 히브리어로 자신을 변호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세계로 흩어졌으며 그들의 언어도 잊어버렸다. 히브리어는 단지 회당에서만 사용하는 언어로 전락되었는데, 이제 새로운 땅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해야 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벤 여후다는 1881년 아내 드보라와 함께 팔레스틴에 도착하였다.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으로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한 해였다.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정착할 땅은 있었지만 아직 그들에게는 언어가 없었다.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벤 여후다는 팔레스틴으로 향하는 배에서 아내에게 “팔레스틴에 도착하면, 히브리어가 아닌 어떤 다른 언어로도 말하거나 쓰지 않을 것”이라고 아내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훗날 그들의 자녀는 2천년 만에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첫 유대인이 되었다. 벤 여후다가 욥바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 땅에는 검은 피부에 가까운 아랍 팔레스타인이 살고 있었다. 당시의 느낌을 벤 여후다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거룩한 약속의 땅에 섰다. 내 조상들의 땅으로 왔지만 그러나 내 마음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벤 여후다는 약속의 땅에 유대인이 아닌 아랍 팔레스타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벤 여후다는 마차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말에게 처음으로 히브리어를 말하였다. 히브리어로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이미 팔레스틴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조금 말할 줄 안다는 것을 벤 여후다는 알았다. 예루살렘에 정착한 벤 여후다 가족은 오직 히브리어만 사용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드보라였다. 그녀는 히브리어를 거의 말할 줄 몰랐다.

벤 여후다의 첫 아들은 이타마르 (Itamar)였다. 벤 여후다와 드보라 부부는 쉽지는 않았지만 아들에게 오직 히브리어만 들려주었다. 히브리어가 아닌 어떤 소리도 듣게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새소리도 듣지 못하게 했다. 히브리어를 못하는 사람은 이들 집에 방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 부부 역시 히브리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한 관계로 이타마르는 5살이 되도록 벙어리처럼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느날, 드보라의 친구는 드보라에게 이렇게 충고하였다. “이타마르가 말을 못하는 것은, 자네 부부가 히브리어를 충분히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이타마르가 말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른 언어를 가르쳐 언어 감각을 갖춘 후에 아이가 자라면서 히브리어를 배우게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였다. 드보라의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그래서 드보라는 남편이 욥바를 다녀오기 위해 집을 떠났을 때에 아들 이타마르에게 러시아 언어로 노래를 불러 주었다. 저녁 나절에 집으로 돌아온 벤 여후다는 아내가 아들에게 러시아 언어로 노래를 불러주는 것을 들었다. 그 순간을 이타마르는 훗날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내 생애에 아버지가 그렇게 분노했던 적을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울고 계셨다. 어머니가 울고 계시는 것을 본 나는 비로소 혀를 움직여 내 생애 처음으로 히브리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타마르는 장성하여 아버지가 시작했던 히브리어 사전 작업을 끝냈다. 약 8천 단어에 이르는 현대 히브리어가 사전으로 탄생하여 처음으로 빛을 본 것이다. 이 히브리어 사전에 기초하여 현대 히브리어는 약 10만 단어로 발전하였고 지금도 날마다 새로운 단어들이 생겨난다. 과학자, 시인, 신문 기자, 교수, 모든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현대 히브리어는 벤 여후다에 의해 시작되어 그의 아들에 의해 완성된 현대 히브리어 사전에서 발전된 단어들이다. 아이스크림, 컴퓨터, 자전거, 비행기, 지금도 많은 새로운 단어들이 생겨난다. 벤 여후다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거의 모든 단어를, 그리고 어떤 단어는 현대 아랍어에서 가져와 현대 히브리어를 부활시켰다.

▶벽에 붙여놓은 현대 히브리어의 광고지이다
현대 히브리어를 만드는 일에, 벤 여후다를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사람들은 정통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히브리어로 화장실을 말하며, 히브리어로 욕을 하고 히브리어로 불의를 이야기하는 것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공권력을 동원해서 벤 여후다를 감옥에 가두기도 하였다. 또한 평범한 많은 유대인들도 벤 여후다의 신기루와 같은 꿈을 두고, 많이 낙심케 하였다. “그것은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결코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벤 여후다는 어떤 반대에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말하고 히브리어로 소설을 발표되고 히브리어로 영화를 제작하며 히브리어로 논문을 발표한다. 여기까지 오는데 거의 100년이 걸렸다. 벤 여후다의 수고는 언어 이상의 영향을 끼쳤다. 그는 언어를 통하여 모든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었으며 동시에 모든 유대인들에게 현대 세계를 그들의 언어로 들려주었던 것이다.

사전 작업에 매달리면서 마지막으로 벤 여후다가 씨름했던 단어는 네페쉬 (vp,n<ï.)였다. 네페쉬는 영, 혼, 영혼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창세기 2: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 (느쉬마트 하임)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 (네페쉬 하야)이 된지라’ 기록되었다. 네페쉬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사람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 같은 것이다. 벤 여후다에게 네페쉬 (vp,n<ï.)는 그의 육체에 힘을 주었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을 믿게 하는 언어를 만드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벤 여후다는 12명의 자녀를 두었고, 1922년 65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살아서 자신을 반대하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벤 여후다는 낙심하지 않았고 마침내 모든 유대인들에게 영원히 은혜를 미칠 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되살려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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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섭 목사(멤피스장로교회)는 성경의 사실적 배경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를 학습하였고, 예루살렘 대학과 히브리 대학에서 10여년에 걸쳐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 고고학, 히브리인의 문화, 고대 성읍과 도로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4X4 지프를 이용하여 성경의 생생한 현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문의 jooseob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