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또한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도 없다. 즉 창조주와의 관계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과의 유대 관계나 자연과의 관계를 맺으며 살게 된 운명이다. 이러한 관계를 잘 유지하면 성공하고 반대의 경우는 실패한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많은 핍박과 역경 속에서도 신앙을 잘 지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며 한국교회의 빛나는 역사를 이루게 했고, 성장하는 교회로 이끌었다. 특히 대원군 시절과 일본의 지배를 받던 때, 그리고 6.25 전쟁 중에서 수많은 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그 이유로 순교를 당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나님께 대해서는 절대적이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경시하는 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큰 약점으로 꼽히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기에 바로 깨우쳐 주신 말씀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은 ‘고르반’이다. (막7:11-14))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께 잘 바치면 부모에게는 못 드려도 괜찮다는 생각은 큰 잘못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라고 지적하셨다.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강도를 만나 있는 돈을 강도에게 다 빼앗기고 칼에 찔려 길가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하고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이 있다. 그들은 불쌍한 사람을 돕는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고 성전에 오는 사람들을 돕는 일 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자처하는 성직자였다. 그러나 다음에 나타난 사마리아 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을 때, 지체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일을 중단한 채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그 사람을 살려 주었다. 그 비유를 설명하신 주님은 듣고 있던 제자들에게 너희도 사마리아인처럼 살라고 강조하셨다.
여기에서 나는 깊은 진리를 찾는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람을 대할 때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을 줄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해를 줄 사람은 아닐까? 그들은 이것을 먼저 계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가진 돈을 다 빼앗기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그 사람은 자기에게 백 번 해가 될 것이라는 계산으로 도망갔다. 그런 부류의 사람은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기 이익 중심의 인간관계가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며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는 기쁜 마음으로 도운 것이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다.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격려의 말로 새로운 생기를 찾아주고 사업에 실패하거나 사랑의 배신으로 낙담하고 삶의 의욕을 잃은 분들을 만나, 그들에게 장미 같은 희망을 심어주어 스스로 일어나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일이 많고 또 많다.
성경은 인간관계에 대하여 좋은 지침을 전해 주고 있다. 즉 언제나 주위의 사람들과 동고동락 하라는 것이다.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즐거워하는 것 - 그러면 그들의 기쁨이 배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만일에 슬피 우는 사람을 만나면 같이 울면서 그의 아픔을 함께 나누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아픔이 절반으로 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원수에게 까지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할 수 있거든’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신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은 내가 아무리 선으로 대해도 상대방으로부터 냉대나 거절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최선을 다 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면 하늘도 도와서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참고; 롬12:15-21, 고전 9:19-23) ‘I am OK, You are OK’라는 책의 저자는 인간관계를 4부분으로 나누었다. 즉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 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제일 이상적인 관계는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관계를 가지는 것이란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솔직히 다양한 조직 속에서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만 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혹시 가능하다고 해도 현재 좋아하는 그 감정이 언제 변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핵심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실망의 씨를 품게 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고 섬기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낙담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 관계는 건강한 관계로 형성되어 천당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대접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기에 누구를 대하든지 상대방을 섬기고 대접하는 마음과 태도로 임한다면, 그 관계는 멋진 관계로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많은 핍박과 역경 속에서도 신앙을 잘 지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며 한국교회의 빛나는 역사를 이루게 했고, 성장하는 교회로 이끌었다. 특히 대원군 시절과 일본의 지배를 받던 때, 그리고 6.25 전쟁 중에서 수많은 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그 이유로 순교를 당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나님께 대해서는 절대적이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경시하는 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큰 약점으로 꼽히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기에 바로 깨우쳐 주신 말씀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은 ‘고르반’이다. (막7:11-14))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께 잘 바치면 부모에게는 못 드려도 괜찮다는 생각은 큰 잘못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라고 지적하셨다.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강도를 만나 있는 돈을 강도에게 다 빼앗기고 칼에 찔려 길가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하고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이 있다. 그들은 불쌍한 사람을 돕는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고 성전에 오는 사람들을 돕는 일 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자처하는 성직자였다. 그러나 다음에 나타난 사마리아 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을 때, 지체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일을 중단한 채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그 사람을 살려 주었다. 그 비유를 설명하신 주님은 듣고 있던 제자들에게 너희도 사마리아인처럼 살라고 강조하셨다.
여기에서 나는 깊은 진리를 찾는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람을 대할 때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을 줄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해를 줄 사람은 아닐까? 그들은 이것을 먼저 계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가진 돈을 다 빼앗기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그 사람은 자기에게 백 번 해가 될 것이라는 계산으로 도망갔다. 그런 부류의 사람은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기 이익 중심의 인간관계가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며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는 기쁜 마음으로 도운 것이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다.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격려의 말로 새로운 생기를 찾아주고 사업에 실패하거나 사랑의 배신으로 낙담하고 삶의 의욕을 잃은 분들을 만나, 그들에게 장미 같은 희망을 심어주어 스스로 일어나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일이 많고 또 많다.
성경은 인간관계에 대하여 좋은 지침을 전해 주고 있다. 즉 언제나 주위의 사람들과 동고동락 하라는 것이다.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즐거워하는 것 - 그러면 그들의 기쁨이 배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만일에 슬피 우는 사람을 만나면 같이 울면서 그의 아픔을 함께 나누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아픔이 절반으로 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원수에게 까지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할 수 있거든’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신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은 내가 아무리 선으로 대해도 상대방으로부터 냉대나 거절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최선을 다 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면 하늘도 도와서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참고; 롬12:15-21, 고전 9:19-23) ‘I am OK, You are OK’라는 책의 저자는 인간관계를 4부분으로 나누었다. 즉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 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제일 이상적인 관계는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관계를 가지는 것이란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솔직히 다양한 조직 속에서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만 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혹시 가능하다고 해도 현재 좋아하는 그 감정이 언제 변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핵심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실망의 씨를 품게 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고 섬기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낙담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 관계는 건강한 관계로 형성되어 천당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대접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기에 누구를 대하든지 상대방을 섬기고 대접하는 마음과 태도로 임한다면, 그 관계는 멋진 관계로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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