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을 따라 2000년전으로 올라가면 전쟁과 슬픔만이 있는 곳이 아니다.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환인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단동으로부터 3시간 정도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번 여행은 주몽이 일하던 곳 환인에서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의 수도인 집안시 국내성으로 옮기고 425년 간 강성대국을 이룬 지역, 19대왕 광개토대왕을 거쳐 20대 장수왕이 평양성을 천도를 실행하기 위하여 압록강변의 국내성, 당시 동북아 최대강국인 고구려 문화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나도 여행을 하게 되어 큰 보람을 느낀다.

당시 오녀봉 청석골 석공장의 딸 연화를 광개토대왕의 아들이 너무나도 사랑하여 행복해하는 두 사람에게 큰 시련이 닥쳐 왔다. 그것은 태자의 신분을 숨기고 만난지 2년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승하하면서 졸지에 왕위를 승계 받아 광활한 고구려의 제20대 왕이 되어야만 했고 이것이 연화에게는 절망의 소식이 되였던 것이다. 매우 천한 신분인 연화는 처녀의 몸으로 후궁으로도 들어 갈수 없는 신분으로 고구려왕으로 즉위한 장수왕 근처에 접근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화를 데려가려면 후궁으로도 불가능한 것은 신분 때문이다. 할수 없이 연화는 성 밖에서 절망과 슬픔을 먹음고 오로지 성군되심만을 기원할 뿐이였다. 장수왕은 왕이 된 후에도 바쁜 일정을 뒤로 한 채 첫사랑의 연화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그녀를 다시 만날까하는 궁리만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날 묘안을 찾은 것이 연화의 아버지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당시 고구려 왕실에 관습은 왕이 죽은 뒤에 후임 왕이 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임 중에 미리 자신의 묘를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그런 궁궐 관습을 명분으로 장수왕은 오녀봉 석공장이였던 연화 아버지를 왕능 건축의 총책임자로 임명하고 자신의 묘를 거대한 피라미트식으로 석묘를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랑하는 연화를 자주 만나고 그 아버지 석공장이를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함이였다. 결국 그들은 연화와 영원한 사랑을 이루고져 하는 연화의 평소 소원을 기억하고 생각한 것이였지만 채석장을 오녀산봉에서 운송 수단이 없었던 시대에 거대한 돌 수백개를 운반하는 일이 불가능한 일로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러나 장수왕은 고집하여 관철시켰다고 한다.

왕능의 건축이 끝나자 이번엔 더 큰 시련이 다가왔다고 한다. 즉위후 14년차에 고구려가 평양 천도를 결정한 것이다. 남진 정책의 일환으로 북위 등 중국 국가들과의 화해의 제스처로 그리고 왕건만큼이나 막강했던 국내성 호족들을 견재하기 위해서 결정된 평양천도는 그야말로 연화에겐 절망 그 이상 이였다고 한다. 이미 왕의 첫사랑으로 알려진 연화였기에 질투하는 왕비 및 후궁들의 시샘과 반대도 부딪치게 되여 평양성까지 따라 갈수 없는 형편이였다. 안타갑게도 평양성으로 떠나는 날, 연화는 행렬의 먼발치에서 눈물로 눈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따라간다.

연화가 오열할 때 행렬은 압록강을 따라 오골성과 박자성(지금의 단동)을 지난다. 행렬이 압록강의 끝자락 안동(지금의 단동)지역에 이르자 왕은 그제서야 모든 행렬을 멈추게하고 압록강을 넘으면 평양성으로 가게 됨으로 거기서 장수왕은 모두 신하에게 3일간 유숙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 왕은 모든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일간 누구도 자신을 찾지 말라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연화를 만나로 간 것이다. 행열 뒤에 거의 실신지경의 몸으로 힘겹게 따라오던 연화를 발견한 장수왕은 달려가 뜨겁게 그녀를 품에 안고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역사적 일화가 있는 단동에서 5월 단오날 조선민족의 행사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조선족들이 화기애애하며 하루를 즐겁게 교제하며 민족애를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 미국의 교포들도 역사적 가치가 있는 단동을 위하여, 그리고 압록강 저편 신의주와 북한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장수왕이 연화를 사랑 하는것 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저들을 사랑하여 구원받고 함께 천국가는 복음의 기회가 되였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함이 얼마나 큰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 즉 조선족들을 기독교의 사랑으로 녹여야 한다. 10년전 조선족 유치원을 도우며 조선족 선생 10명과 한족 선생 2명이 있었다. 원장을 전도하면 10명의 조선족 선생들이 전도될 것이란 가능성을 갖고 접근한 것이다. 몇차례 만났지만 예수 믿으라 전도하기가 당시 상황에서는 퍽 어려웠다. 만일 이일이 시정부에서 알게 되면 유치원 원장은 파면 당할 뿐아니라 신변에 위험도 따를 때였다. 전도하는 자도 중국 입국에는 문제가 될수 있었다. 지극히 지혜를 짜 대화중에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는 불교가정에서 자랐다고 나 자신을 고백했다. 그리고 미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 국가임을 알고 있기에 미국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처음으로 얘기를 했다. 다음날 저를 안내하면서 자동차 안에서 살짝 김홍도 목사의 소책자 “불기둥”이란 책을 보여 주었다. 그것이 싸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는자 임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얼마나 열정적으로 신앙하는지. 결국 10명의 선생들도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한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알면서 이번 중국 여행도 신앙 하는 사람들 몇을 만났고 앞으로 많은 열매 맺는 일을 위하여 사라의 파장을 보내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