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북 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선교사님들과의 아쉬운 작별을 하고 저와 Grace 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프랑스 왕권의 상징인 베르사이유 궁전을 돌아보며 프랑스 왕정의 흥망 성쇄를 머릿속에 잠시 스케치해보았지요. 상상의 한계를 넘는 화려하고 예술적인 궁전의 안팎, 이에 부속된 1 km 직경의 정원은 압도적인 장관이었습니다. 다 돌아보려면 족히 3일은 걸린다는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당시 4000명이 넘는 귀족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태양왕으로 불리우는 프랑스 황실 최장기 집권자 루이 14세의 명령에 의하여 건축된 베르사이유 궁전은 결국 후에 프랑스혁명 발발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궁전 안 귀족들의 사치와 궁전 밖 민중들의 굶주림은 점점 대조를 이루었고, 성난 민중들은 궁전을 점령하여 당시 루이 16세와 사치와 허영의 대명사, 마리 앙또아네트를 사로잡아 단두대에서 처형함으로 분풀이를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근대 계몽주의의 시작으로 알려진 프랑스 혁명이 1789년 시작됩니다.

저는 베르사이유 궁전과 프랑스 혁명을 신앙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해보며, 역사가 가르치는 교훈을 얻고자 시도해보았습니다. 사실 루이 14세 이전, 중세 유럽은 로마 캐톨릭 중심의 절대적인 신정체제였습니다. 곳곳에 세워진 성당들은 면세 대상으로 엄청난 부를 즐겼지요. 왕권과 교황권 사이의 미묘한 알력이 이어지던 프랑스 왕정에 루이 14세가 등장함으로 왕권의 절대적 우위가 확립됩니다. 이 때 루이 14세는 신교도들을 보호하던 낭트 칙령을 폐지함으로 프랑스 경제를 뒷받침하던 숙련된 상공업 기술자들인 50만 위그노 신교도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는데, 이는 프랑스 경제를 추락케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캐톨릭에 대한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궁전 안에 크고 화려한 성당을 건축하고 십자가를 베르사이유 궁정 가장 높은 곳에 달음으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왕권을 주셨음을 선포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표면적, 형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매일 미사를 드리며 온갖 장식물로 성당을 치장하였지만,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오직 자신의 왕권과 부 및 인간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할 뿐이었지요. 무모한 건축으로 수많은 민중들의 목숨이 희생되었고 무리한 재정 지출로 프랑스 경제는 파탄으로 치달았지만 그는 그저 자신의 왕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민중들의 미움을 받습니다. 루이 14세 이후의 왕들도 사치와 방종으로 일관하며 도탄에 빠진 민중을 외면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성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는데, 이 때 민중들은 왕족들의 하나님에게마저 반기를 듭니다.

그리하여 기독교를 프랑스에서 철저히 추방하자는 무신론을 주장하며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지만 아이러닉하게도 프랑스 민중들은 이성의 여신, 또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또다른 신을 만들고 숭배합니다. 물론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의 개념을 도입하고 문화, 예술, 지성의 발전을 불러오는 서구 계몽주의의 모체가 되었지만 슬픈 사실은 프랑스와 유럽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자유주의 신학이 싹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시인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파리의 골목들을 Grace 와 함께 걸어다니며, 우리는 깨끗하고 예술적이며 세련된 거리의 모습들, 친절하고 상냥한 파리 사람들 그리고 뛰어난 이들의 음식 문화에 호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살아갈 목적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멍한 표정의 젊은이들이 카페들을 메우며 줄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을 도처에서 발견합니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재발견함으로 프랑스가 깨어나는 또 다른 프랑스 혁명이 이번에는 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