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경 목사는 50대의 나이에 선교사로 자원해 지난 11년간 헝가리 집시선교사역을 해왔다. 헝가리 사역을 끝으로 30년의 교회와 선교 사역을 마치고 은퇴해서 지금 마린 카운티 노바토에 살고 있다. 김광선 목사를 쌘 안셀모에 있는 PCUSA 장로교 신학교에 들어가도록 조언한 인연으로 지금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고 했다.
조 목사는 PCUSA소속 헝가리 선교사로 자원했고 그의 아내는 기장교단 소속으로 헝가리 집시선교를 동역했다.
헝가리 개혁교회 국내 선교부에 속해 있으면서 집시족(그들을 공식적으로는 로미나족이라고 부른다.)을 위한 선교를 시작해서 집시 교회를 개척하고 사역을 했다. 이것은 헝가리 기독 교계에서 집시족을 위한 처음 교회로서 헝가리 개혁 교회가 집시 사역을 시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헝가리에 왠 인도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지'하며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들 모두 집시족이었다"
헝가리 1000만명 인구에 70만-150만명의 집시족이 있다. 집시족 인구 집계가 정확하게 잘 안 되는 이유는 배급할때는 모두 나오다가 정작 통계나 국가적 의무를 위한 모임에는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 헝가리에는 군 징집 제도가 없음. 이들은 헝가리 시민이긴 하지만, 한마디로 초대받지 않는 거대한 손님 군이라고 할 수있다.
조수경 목사는 "처음에는 영어를 가르치며 헝가리칼빈개혁교회 대학생사역을 돕기 위해 선교사로 파송됐지만, 나중에 집시족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PCUSA와 헝가리 개혁 교회단의 프로그램으로 선교 사역을 시작하게 됐다.
집시족 선교는 쉽지 않았다
집시 선교할 때, 반감은 없었냐고 물으니까 그는 "집시 선교 때에 집시들로 부터 반감을 받은 적이 없어요.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 버림받은 그들을 찾아 갔는데 따뜻한 마음씨의 그들이 우리를 거부할 리가 있어요? 그들은 남의 땅에 살며 생존 자체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이 동네의 주인인가를 아는게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하지요. 박해를 오래 받아서 천주교 강한 지역에서는 자기를 천주교인이라고 하고 개신교가 강하면 개신교인이라고 해요. 알바니아의 집시들은 자기들을 모두 모슬림이라고 한다잖아요"고 말했다.
"집시족들이 세례도 안받았다고 하면서, 5,6번 받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두 손 다 들게든다. 세례를 안받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남을 기쁘게 해주려는 것이다"
"뭘 주겠다고 하면 500명이 순식간에 교회에 모인다. 선교사의 수고로 교회당을 건축해서 자기들 교회가 있지만 오후 3시에 주일예배를 드렸는데 이유는 밤 새도록 놀고 새벽 3,4시에 자고 오후 늦게 일어야 일어나니 일찍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낮은 학력수준, 공동체 형성 안돼..사회적 편견의 악순환도 있어
집시족은 더운 지역에서 살고 낙천적인 성격에 박해받고 밀려나면서 유랑노래, 춤이 발달했다. 선천적으로 음악을 잘 배운다. 공산당 정권때에는 이동의 자유를 주지않고 식당에서 노래부르게 했다.
"일거리가 있으면 자기들끼리 트럭개조해서 소문을 듣고 재빨리 몰려가서 일하고 다시 논다. 그들은 파워를 형성하기 어렵다. 성향이 흩어지는 민족이다. 주로 구걸, 도둑질하고 밑바닥 계층이 사는 곳에서 떠돌아다니면서 산다. 정서가 원래 그렇다. 단지 그들 자신들의 사회나 동네를 구성하지 못하기 떼문에 집시족을 위한 정부의 특별한 시책을 마련할 도리가 없다."
흥미로운 것은, 집시족은 그렇게 사람수가 많아도 영향력은 극히 미비하다는 점이다. 조 목사는 "그들은 커뮤니티를 만들지 않는다. 5, 6가정이 저마다 흩어져 산다. 단결을 못해 자기들만의 사회를 못 만든다"고 말했다.
집시족은 평균학력이 굉장히 낮다. 학교공부를 억지로 시켜도 몇 달을 못버틴다. 여기에 사회적 편견의 악순환이 있다. 집시족은 일을 시켜도 어차피 도둑질할거라는 사회적 인식이 아이들에게 학업성취의욕을 떨어뜨리고, 또 학력수준이 낮으니 더 천대받게 된다. 교육수준이 낮은 것이 악순환된다.
"체면, 이중성에 대해 여러 말들이 많지만 공부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교문화는 한국에겐 큰 문화자산일지 모른다"고 조목사는 말했다.
생활환경은 워낙 열악해서 평균연령이 45세이다. 다산을 축복이라고 생각해 아이를 많이 낳는다. 남자들은 워낙 많이 죽거나 감옥을 가기 때문에 여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다른 남자와 다시 계속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원래 문화 자체가 돈 있으면 일 안하고 돈 없으면 일한다. 유럽이 하나가 되면서 집시들이 국가를 마음대로 이동하게 됐다. 유럽에 1200만명의 집시가 있다. 집시족들이 EU 전체의 골칫거리가 됐다. 비인권사각지대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유럽의 이슈다"
집시족의 어원은
유럽의 집시족 유래는 이렇게 본다. 약 500년전 그리스에 일단의 무리가 왔다. 어디서 온 사람인지 몰랐지만 그 생김새를 보고 아마 이집트라고 생각했다. 그리스어는 단어의 처음 오는 모음을 발음하지 않기에 Egptian의 'e'를 발음을 하지 않아서 유럽 사람들은 그들을 (에)집시안 - 집시 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인도의 천민계층 사람들이다. 모슬렘으로 인해 핍박을 받고 점차 서진해 파키스탄, 이란을 거쳐 그리스로 오게 됐다.
조 목사느 "집시족에게 집시라고 부르니까 매우 싫어했다. 한국사람보고 일본인이 조센징이라고 부른것과 비슷하다. 이미 말 속에 좋지 않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헝가리 개혁교회, 처음에는 집시족 선교 거부해
처음 헝가리 개혁교회는 집시족을 위한 선교를 반대했다. 헝가리 개혁교회는 헝가리 사람만을 위한 교회였다. 집시족은 헝가리 사람이 아니라는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조 목사는 "유럽에서 개신교는 특히 민족주의와 깊이 연관돼 있다"고 말했다.
"유럽의 개신 교회들은 국가 교회의 개념이 역사적으로 강해서인지 선교란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개신교회들은 자기 교회는 자기 민족을 위한 교회라고 믿고 그들끼라만 신앙 생활을 하고 싶어한다. 헝가리 개신교도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천주교에 반대하면서 나왔다"
공산권이 물러간 이후 헝가리 개혁교회는 PCUSA 교단과 교류하면서 달래기도하고 지원받으면서 할 수 없이 집시족을 위한 교회 선교를 시작한 측면이 많다.
"6, 7년전에 헝가리계 유태인이 노벨 문학상을 탔을때 축하한다고 말하니까 어느 헝가리 개혁교회 목사가 그 사람은 유태인이지 헝가리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헝가리에 몇백년간 살았어도 타민족은 헝가리 국민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만큼 민족이나 교회가 민족주의 색체가 강하다"
헝가리는 개헉교회는 역사적으로 큰 교단을 형성해 자긍심이 많은데, 공산권 박해를 받으면서 교회가 많이 축소됐다.
부다페스트 칼빈 광장 개혁교회는 공산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는 3000여명의 교인이 있었는데 공산권 몰락시기에는 그 중에서 150여 명만 남았다. 공직자, 공무원, 군인, 교사는 예배당을 못나가게 정부가 방해했다. 40년 공산정권 통치 속에 있다 보니 교회에는 노인과 가난한 사람만 남은 셈이다.
조수경 목사는 이제는 비록 집시 선교 사역에서 은퇴했지만, 헝가리 개혁 교회가 그가 맡고 있던 로마니 교회를 맡아 선교를 이어가고 있다. 헝가리 개혁 교회 출신 목회자가 지금 집시족 교회를 맡고 있다.
게다가, 헝가리 개혁교회는 조목사 내외의 집시족을 위한 선교와 교회를 세운 후에 소수 민족에 대한 배려와 공로를 인정받아 로 유럽 연합으로부터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헝가리 개혁 교회는 편지를 보내와 ".... 이제는 우리 교회가 세상의 교회를 향해 잃어버린 자를 위해 교회가 수고하는 자랑스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라고 조수동 목사는 말했다.
조 목사는 PCUSA소속 헝가리 선교사로 자원했고 그의 아내는 기장교단 소속으로 헝가리 집시선교를 동역했다.
헝가리 개혁교회 국내 선교부에 속해 있으면서 집시족(그들을 공식적으로는 로미나족이라고 부른다.)을 위한 선교를 시작해서 집시 교회를 개척하고 사역을 했다. 이것은 헝가리 기독 교계에서 집시족을 위한 처음 교회로서 헝가리 개혁 교회가 집시 사역을 시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헝가리에 왠 인도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지'하며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들 모두 집시족이었다"
헝가리 1000만명 인구에 70만-150만명의 집시족이 있다. 집시족 인구 집계가 정확하게 잘 안 되는 이유는 배급할때는 모두 나오다가 정작 통계나 국가적 의무를 위한 모임에는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 헝가리에는 군 징집 제도가 없음. 이들은 헝가리 시민이긴 하지만, 한마디로 초대받지 않는 거대한 손님 군이라고 할 수있다.
조수경 목사는 "처음에는 영어를 가르치며 헝가리칼빈개혁교회 대학생사역을 돕기 위해 선교사로 파송됐지만, 나중에 집시족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PCUSA와 헝가리 개혁 교회단의 프로그램으로 선교 사역을 시작하게 됐다.
집시족 선교는 쉽지 않았다
집시 선교할 때, 반감은 없었냐고 물으니까 그는 "집시 선교 때에 집시들로 부터 반감을 받은 적이 없어요.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 버림받은 그들을 찾아 갔는데 따뜻한 마음씨의 그들이 우리를 거부할 리가 있어요? 그들은 남의 땅에 살며 생존 자체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이 동네의 주인인가를 아는게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하지요. 박해를 오래 받아서 천주교 강한 지역에서는 자기를 천주교인이라고 하고 개신교가 강하면 개신교인이라고 해요. 알바니아의 집시들은 자기들을 모두 모슬림이라고 한다잖아요"고 말했다.
"집시족들이 세례도 안받았다고 하면서, 5,6번 받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두 손 다 들게든다. 세례를 안받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남을 기쁘게 해주려는 것이다"
"뭘 주겠다고 하면 500명이 순식간에 교회에 모인다. 선교사의 수고로 교회당을 건축해서 자기들 교회가 있지만 오후 3시에 주일예배를 드렸는데 이유는 밤 새도록 놀고 새벽 3,4시에 자고 오후 늦게 일어야 일어나니 일찍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낮은 학력수준, 공동체 형성 안돼..사회적 편견의 악순환도 있어
집시족은 더운 지역에서 살고 낙천적인 성격에 박해받고 밀려나면서 유랑노래, 춤이 발달했다. 선천적으로 음악을 잘 배운다. 공산당 정권때에는 이동의 자유를 주지않고 식당에서 노래부르게 했다.
"일거리가 있으면 자기들끼리 트럭개조해서 소문을 듣고 재빨리 몰려가서 일하고 다시 논다. 그들은 파워를 형성하기 어렵다. 성향이 흩어지는 민족이다. 주로 구걸, 도둑질하고 밑바닥 계층이 사는 곳에서 떠돌아다니면서 산다. 정서가 원래 그렇다. 단지 그들 자신들의 사회나 동네를 구성하지 못하기 떼문에 집시족을 위한 정부의 특별한 시책을 마련할 도리가 없다."
흥미로운 것은, 집시족은 그렇게 사람수가 많아도 영향력은 극히 미비하다는 점이다. 조 목사는 "그들은 커뮤니티를 만들지 않는다. 5, 6가정이 저마다 흩어져 산다. 단결을 못해 자기들만의 사회를 못 만든다"고 말했다.
집시족은 평균학력이 굉장히 낮다. 학교공부를 억지로 시켜도 몇 달을 못버틴다. 여기에 사회적 편견의 악순환이 있다. 집시족은 일을 시켜도 어차피 도둑질할거라는 사회적 인식이 아이들에게 학업성취의욕을 떨어뜨리고, 또 학력수준이 낮으니 더 천대받게 된다. 교육수준이 낮은 것이 악순환된다.
"체면, 이중성에 대해 여러 말들이 많지만 공부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교문화는 한국에겐 큰 문화자산일지 모른다"고 조목사는 말했다.
생활환경은 워낙 열악해서 평균연령이 45세이다. 다산을 축복이라고 생각해 아이를 많이 낳는다. 남자들은 워낙 많이 죽거나 감옥을 가기 때문에 여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다른 남자와 다시 계속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원래 문화 자체가 돈 있으면 일 안하고 돈 없으면 일한다. 유럽이 하나가 되면서 집시들이 국가를 마음대로 이동하게 됐다. 유럽에 1200만명의 집시가 있다. 집시족들이 EU 전체의 골칫거리가 됐다. 비인권사각지대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유럽의 이슈다"
집시족의 어원은
유럽의 집시족 유래는 이렇게 본다. 약 500년전 그리스에 일단의 무리가 왔다. 어디서 온 사람인지 몰랐지만 그 생김새를 보고 아마 이집트라고 생각했다. 그리스어는 단어의 처음 오는 모음을 발음하지 않기에 Egptian의 'e'를 발음을 하지 않아서 유럽 사람들은 그들을 (에)집시안 - 집시 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인도의 천민계층 사람들이다. 모슬렘으로 인해 핍박을 받고 점차 서진해 파키스탄, 이란을 거쳐 그리스로 오게 됐다.
조 목사느 "집시족에게 집시라고 부르니까 매우 싫어했다. 한국사람보고 일본인이 조센징이라고 부른것과 비슷하다. 이미 말 속에 좋지 않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헝가리 개혁교회, 처음에는 집시족 선교 거부해
처음 헝가리 개혁교회는 집시족을 위한 선교를 반대했다. 헝가리 개혁교회는 헝가리 사람만을 위한 교회였다. 집시족은 헝가리 사람이 아니라는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조 목사는 "유럽에서 개신교는 특히 민족주의와 깊이 연관돼 있다"고 말했다.
"유럽의 개신 교회들은 국가 교회의 개념이 역사적으로 강해서인지 선교란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개신교회들은 자기 교회는 자기 민족을 위한 교회라고 믿고 그들끼라만 신앙 생활을 하고 싶어한다. 헝가리 개신교도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천주교에 반대하면서 나왔다"
공산권이 물러간 이후 헝가리 개혁교회는 PCUSA 교단과 교류하면서 달래기도하고 지원받으면서 할 수 없이 집시족을 위한 교회 선교를 시작한 측면이 많다.
"6, 7년전에 헝가리계 유태인이 노벨 문학상을 탔을때 축하한다고 말하니까 어느 헝가리 개혁교회 목사가 그 사람은 유태인이지 헝가리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헝가리에 몇백년간 살았어도 타민족은 헝가리 국민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만큼 민족이나 교회가 민족주의 색체가 강하다"
헝가리는 개헉교회는 역사적으로 큰 교단을 형성해 자긍심이 많은데, 공산권 박해를 받으면서 교회가 많이 축소됐다.
부다페스트 칼빈 광장 개혁교회는 공산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는 3000여명의 교인이 있었는데 공산권 몰락시기에는 그 중에서 150여 명만 남았다. 공직자, 공무원, 군인, 교사는 예배당을 못나가게 정부가 방해했다. 40년 공산정권 통치 속에 있다 보니 교회에는 노인과 가난한 사람만 남은 셈이다.
조수경 목사는 이제는 비록 집시 선교 사역에서 은퇴했지만, 헝가리 개혁 교회가 그가 맡고 있던 로마니 교회를 맡아 선교를 이어가고 있다. 헝가리 개혁 교회 출신 목회자가 지금 집시족 교회를 맡고 있다.
게다가, 헝가리 개혁교회는 조목사 내외의 집시족을 위한 선교와 교회를 세운 후에 소수 민족에 대한 배려와 공로를 인정받아 로 유럽 연합으로부터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헝가리 개혁 교회는 편지를 보내와 ".... 이제는 우리 교회가 세상의 교회를 향해 잃어버린 자를 위해 교회가 수고하는 자랑스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라고 조수동 목사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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