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어떤 사람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방언을 받았다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십년도 넘게 방언의 은사를 구했는데도 아직 방언을 못한다고 낙심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도대체 방언은 어떻게 말하게 되는 건가요? 그리고 방언 못하는 사람을 위해 방언 받기를 기도해 주는 일은 좋은 일인가요?
A) 지난 번 글에서 저는 방언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의 입장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현재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단지 오순절교단에 속한 이들뿐 아니라 범교단적으로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대단히 확장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순절교단들이 창립되던 20세기 초에 비해 한 세기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이지요. 이제 남미나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지역의 기독교 확산지역에서는 방언에 대한 논의를 꺼내는 것조차 새삼스러울 정도로 당연시되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주 쉽게 방언을 경험하는데 비해, 또 어떤 이들은 방언을 받지 못해 낙심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점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우선 방언을 말하게 되는 발성과정은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오순절주의 신학자인 거스(RoHollis Gause)는 우선 진정한 방언이란 인위적인 조작이나 학습 또는 연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RoHollis Gause, 「성령안에서 사는 삶」, 102).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받게 해 준다고 자기 방언을 따라 하라고 강요를 하거나 ‘할렐루야’를 반복해서 빠르게 발음하다 보면 방언을 하게 된다고 가르치는데, 이런 행위들은 인위적 조작과 모방에 근거한 것이지 성령의 감동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방언을 할 수 있다면 그런 발성행위는 성령 받지 못한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as the Spirit enabled them, NIV) 하는 것이지 인간의 의도나 학습을 통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방언은 언제나 성령의 감동으로 되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방언 말하기를 오랜 동안 사모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성령의 감동이 자기 속에 충만하기를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 어떤 성도님 부부가 수년 동안 방언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기도에도 불구하고 방언을 경험하지 못하자 기도생활에도 낙심이 들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부가 제게 이런 사정을 하소연해 왔고, 저는 잠시 하나님의 낯을 살핀 후 이 두 분을 도와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 저는 한분씩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성령의 감동이 그들의 발성기관을 통해 나타날 것을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즉시 그들 부부의 입에서 방언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 동안의 제 사역현장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방언은 성령 충만함을 받았을 때 그 감동으로 인해 발성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오순절주의자인 변종호는 적어도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면 우리의 혀는 성령이 관리 사용하셔서 성령이 하고 싶은 말씀이 우리 입을 통해서 나옴을 알고 믿고 감사하고 찬송하여야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이처럼 방언이란 성령에게 언어 도구인 내 혀를 빼앗기고, 발성기관인 성대와 폐장을 점령당하고, 사고 작용의 총본부인 뇌신경을 차압당하여, 인간적인 모든 기관과 활동을 추방하고 성령이 주인 노릇함을 의미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변종호, 「한국의 오순절신앙운동사」, 16). 그리고 역시 오순절주의 신학자인 윌리암스(J. Rodman Williams)는 방언의 발성 현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방언이 말해질 때 사람의 발성 기관(입, 혀, 성대)이 모두 사용되어지나 그 말은 화자가 하는 말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 말은 성령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며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사람은 성령의 강력한 임재로 인해 새로운 마음 상태에서 방언이 터져 나온다. 이로 인한 변화가 일어나므로 사람의 언어는 성령의 놀라운 매개물로 전이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에게 방언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에 따라 그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강제감이나 강요감이 있을 수 없다(J. Rodman Williams, 「오순절 조직신학」, 2:291-2).
이처럼 방언의 현상은 우리의 발성기관을 성령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그 감동에만 맡기는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하기를 원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으로 만들어 낸 일상 언어로 된 기도만을 계속 발성하고 있다면, 어떻게 성령께서 우리의 발성기관을 통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나타내실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만 잘 이해하신다면, 성령 받은 크리스천 가운데 방언 말하기를 사모하는 이들은 대부분 방언을 말하게 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다 방언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는 말씀과도 같이,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해야만 한다고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방언을 말해야만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던가, 아니면 방언을 받아야 또 다른 은사들을 또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던가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A) 지난 번 글에서 저는 방언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의 입장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현재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단지 오순절교단에 속한 이들뿐 아니라 범교단적으로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대단히 확장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순절교단들이 창립되던 20세기 초에 비해 한 세기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이지요. 이제 남미나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지역의 기독교 확산지역에서는 방언에 대한 논의를 꺼내는 것조차 새삼스러울 정도로 당연시되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주 쉽게 방언을 경험하는데 비해, 또 어떤 이들은 방언을 받지 못해 낙심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점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우선 방언을 말하게 되는 발성과정은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오순절주의 신학자인 거스(RoHollis Gause)는 우선 진정한 방언이란 인위적인 조작이나 학습 또는 연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RoHollis Gause, 「성령안에서 사는 삶」, 102).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받게 해 준다고 자기 방언을 따라 하라고 강요를 하거나 ‘할렐루야’를 반복해서 빠르게 발음하다 보면 방언을 하게 된다고 가르치는데, 이런 행위들은 인위적 조작과 모방에 근거한 것이지 성령의 감동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방언을 할 수 있다면 그런 발성행위는 성령 받지 못한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as the Spirit enabled them, NIV) 하는 것이지 인간의 의도나 학습을 통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방언은 언제나 성령의 감동으로 되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방언 말하기를 오랜 동안 사모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성령의 감동이 자기 속에 충만하기를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 어떤 성도님 부부가 수년 동안 방언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기도에도 불구하고 방언을 경험하지 못하자 기도생활에도 낙심이 들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부가 제게 이런 사정을 하소연해 왔고, 저는 잠시 하나님의 낯을 살핀 후 이 두 분을 도와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 저는 한분씩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성령의 감동이 그들의 발성기관을 통해 나타날 것을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즉시 그들 부부의 입에서 방언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 동안의 제 사역현장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방언은 성령 충만함을 받았을 때 그 감동으로 인해 발성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오순절주의자인 변종호는 적어도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면 우리의 혀는 성령이 관리 사용하셔서 성령이 하고 싶은 말씀이 우리 입을 통해서 나옴을 알고 믿고 감사하고 찬송하여야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이처럼 방언이란 성령에게 언어 도구인 내 혀를 빼앗기고, 발성기관인 성대와 폐장을 점령당하고, 사고 작용의 총본부인 뇌신경을 차압당하여, 인간적인 모든 기관과 활동을 추방하고 성령이 주인 노릇함을 의미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변종호, 「한국의 오순절신앙운동사」, 16). 그리고 역시 오순절주의 신학자인 윌리암스(J. Rodman Williams)는 방언의 발성 현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방언이 말해질 때 사람의 발성 기관(입, 혀, 성대)이 모두 사용되어지나 그 말은 화자가 하는 말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 말은 성령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며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사람은 성령의 강력한 임재로 인해 새로운 마음 상태에서 방언이 터져 나온다. 이로 인한 변화가 일어나므로 사람의 언어는 성령의 놀라운 매개물로 전이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에게 방언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에 따라 그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강제감이나 강요감이 있을 수 없다(J. Rodman Williams, 「오순절 조직신학」, 2:291-2).
이처럼 방언의 현상은 우리의 발성기관을 성령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그 감동에만 맡기는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하기를 원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으로 만들어 낸 일상 언어로 된 기도만을 계속 발성하고 있다면, 어떻게 성령께서 우리의 발성기관을 통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나타내실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만 잘 이해하신다면, 성령 받은 크리스천 가운데 방언 말하기를 사모하는 이들은 대부분 방언을 말하게 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다 방언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는 말씀과도 같이,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해야만 한다고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방언을 말해야만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던가, 아니면 방언을 받아야 또 다른 은사들을 또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던가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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