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느 순간부터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었어요. 아마 한 일곱살 쯤 부터였던 것 같애요. 슬픈 장면을 봐도 아무 감정도 없고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 한 방울 안 나요. 집사람이 그런 저한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빈정거려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다른 사람들 마음을 읽을 수도 없고 그들이 자신들의 고민을 얘기해도 아무런 공감도 할 수가 없어요.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큰 애로사항이죠.”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감정을 느끼면 너무 아프고 힘들고 괴롭기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감정을 억압하다보니 감정을 느끼지도 못하고 표현하기도 어렵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사람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반면에,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마음의 병을 극심하게 앓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감정을 억압해 놓은 이유는 생존을 위해 온 힘을 다해 투쟁하다가 생긴 결과입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마다, 우리의 내면을 침투해 들어오는 수치심, 분노, 불안, 외로움, 무시당하는 느낌, 비난받는 느낌, 깊은 상실감, 표현할 수 없는 슬픔, 두려움 등의 감정이 우리의 내면을 휘저으며 존재감을 상실하게 할 만큼의 위력으로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투쟁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생기고 저항이 생기고 페르조나(persona)를 두껍게 덧씌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들은 나의 페르조나를 진짜 나로 착각하며 대합니다. 그러다 어느덧 나 또한 페르조나에 갇힌 나를 진짜 나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러한 억압된 감정 중에서도 슬픔의 감정은 매우 깊은 근본인 치유를 받아야할 부정적 정서입니다. 슬픔을 승화시키면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탄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슬픔이 변질된 무수한 파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리게 되는지 알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 극심하게 느껴왔던 고통스러운 슬픔의 기억을 억압합니다. 슬픔 자체 보다는 슬픔 이면에서 파편화된 또다른 감정들이 무수히 공격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슬픔을 느끼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또 눌러놓는 것입니다. 그 슬픔에 자신이 함몰되어 사라질 것 같은 불안이 있기 때문에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메커니즘으로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불안정한 견고함으로 묶어두는 것입니다.
슬픔을 슬퍼하지 못하면 치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의 숨겨진 감정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 감정들은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이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무의식적으로 감추어둔 자신의 숨겨진 감정을 찾아 치유의 여정을 걷다보면 하나씩 부딪히고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불에 댄 듯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잠깐 사이에 지나갑니다. 그러면 신속히 치유가 됩니다.
슬픔의 치유 가운데 가장 강력한 치유는 비슷한 경험을 극복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공감적 경청’을 받게 될 때 일어납니다. 슬픔을 많이 겪은 사람이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두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그의 상처입은 치유자로서의 위력이 나타납니다. 공감은 우리의 숨막히는 불안을 잠재우고 숨통을 틔워줍니다. 그래서 전문상담자들이 가장 신경쓰는 것도 공감적 태도와 경청입니다. 때로는 상담자 자신이 자신의 슬픔에 관한 경험을 오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담자는 깊은 공감 속에서 자신의 슬픔을 되짚어보는 힘을 얻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슬픔을 슬퍼하지 못할 때 분노가 쌓이고 우울이 깊어지게 됩니다. 슬픔의 감정은 무섭게 우리의 영혼을 찢어놓습니다. 찢어지는 아픔이 어디선가 막연하게 올라올 때마다 분노를 터뜨리거나 자살충동을 느낄 만큼의 우울 무드로 내려가는 양상으로도 나타납니다. 슬픔이 병이 되어 나타나는 양상을 그대로 방치하는 기간이 오래될수록 그 사람의 내면은 성숙을 잃어버립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어린아이로 퇴행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잠재된 깊은 슬픔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능력을 퇴색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관계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면 영원히 심리적 유아기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군가 가장 신뢰할 수 있고 내면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찾아가 자기 내면의 슬픔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거기서 부터 치유는 시작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주변에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면 인간의 온갖 슬픔을 온 몸으로 느끼셨던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없는 척 하지 말고 온 몸과 영혼에 묻은 누추한 슬픔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고요히 치유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치유와 함께 심리적 ․ 영적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상담심리치료센터 [www.kclatc.com]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감정을 느끼면 너무 아프고 힘들고 괴롭기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감정을 억압하다보니 감정을 느끼지도 못하고 표현하기도 어렵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사람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반면에,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마음의 병을 극심하게 앓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감정을 억압해 놓은 이유는 생존을 위해 온 힘을 다해 투쟁하다가 생긴 결과입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마다, 우리의 내면을 침투해 들어오는 수치심, 분노, 불안, 외로움, 무시당하는 느낌, 비난받는 느낌, 깊은 상실감, 표현할 수 없는 슬픔, 두려움 등의 감정이 우리의 내면을 휘저으며 존재감을 상실하게 할 만큼의 위력으로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투쟁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생기고 저항이 생기고 페르조나(persona)를 두껍게 덧씌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들은 나의 페르조나를 진짜 나로 착각하며 대합니다. 그러다 어느덧 나 또한 페르조나에 갇힌 나를 진짜 나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러한 억압된 감정 중에서도 슬픔의 감정은 매우 깊은 근본인 치유를 받아야할 부정적 정서입니다. 슬픔을 승화시키면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탄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슬픔이 변질된 무수한 파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리게 되는지 알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 극심하게 느껴왔던 고통스러운 슬픔의 기억을 억압합니다. 슬픔 자체 보다는 슬픔 이면에서 파편화된 또다른 감정들이 무수히 공격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슬픔을 느끼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또 눌러놓는 것입니다. 그 슬픔에 자신이 함몰되어 사라질 것 같은 불안이 있기 때문에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메커니즘으로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불안정한 견고함으로 묶어두는 것입니다.
슬픔을 슬퍼하지 못하면 치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의 숨겨진 감정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 감정들은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이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무의식적으로 감추어둔 자신의 숨겨진 감정을 찾아 치유의 여정을 걷다보면 하나씩 부딪히고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불에 댄 듯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잠깐 사이에 지나갑니다. 그러면 신속히 치유가 됩니다.
슬픔의 치유 가운데 가장 강력한 치유는 비슷한 경험을 극복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공감적 경청’을 받게 될 때 일어납니다. 슬픔을 많이 겪은 사람이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두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그의 상처입은 치유자로서의 위력이 나타납니다. 공감은 우리의 숨막히는 불안을 잠재우고 숨통을 틔워줍니다. 그래서 전문상담자들이 가장 신경쓰는 것도 공감적 태도와 경청입니다. 때로는 상담자 자신이 자신의 슬픔에 관한 경험을 오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담자는 깊은 공감 속에서 자신의 슬픔을 되짚어보는 힘을 얻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슬픔을 슬퍼하지 못할 때 분노가 쌓이고 우울이 깊어지게 됩니다. 슬픔의 감정은 무섭게 우리의 영혼을 찢어놓습니다. 찢어지는 아픔이 어디선가 막연하게 올라올 때마다 분노를 터뜨리거나 자살충동을 느낄 만큼의 우울 무드로 내려가는 양상으로도 나타납니다. 슬픔이 병이 되어 나타나는 양상을 그대로 방치하는 기간이 오래될수록 그 사람의 내면은 성숙을 잃어버립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어린아이로 퇴행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잠재된 깊은 슬픔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능력을 퇴색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관계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면 영원히 심리적 유아기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군가 가장 신뢰할 수 있고 내면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찾아가 자기 내면의 슬픔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거기서 부터 치유는 시작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주변에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면 인간의 온갖 슬픔을 온 몸으로 느끼셨던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없는 척 하지 말고 온 몸과 영혼에 묻은 누추한 슬픔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고요히 치유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치유와 함께 심리적 ․ 영적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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