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한다. 정체 혹은 후퇴하고 있는 성장세, 자꾸만 들려오는 부정적 소식들, 교회에 대한 사회의 불신 팽배 등 총체적 난국은 미래 한국교회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 구석구석에서 여전히 저마다의 영성과 철학으로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지는 특별히 목회 현장 가운데에서 한국교회에 희망을 전하는 리더십 50인을 만나 그들의 사역을 소개함으로써 한국교회에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목회자? 아주 완벽하거나 아주 솔직하거나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는 유명한 사람이다. 물론 교회의 가파른 성장세 때문이다. 지난 2002년 개척 때부터 지금까지 8년 간, 교인수가 30명에서 약 1만명으로 늘었다. 지금은 예전처럼 교회 간판만 내걸어도 사람들이 몰려오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놀랍다. 무엇이 이런 성장을 가능케 했을까.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말하고 그를 궁금해하는 이유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 빽빽한 지상의 답답함을 피해 여유로운 지하를 달려 분당선 이매역에 도착했다. 주변이 생각보단 한적하다. 하나님께 공간이 무의미하듯, 그를 닮은 우리 영혼도 거리를 마다하지 않는 걸까. 아무리 둘러봐도 1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이곳 가까이 사는 것 같진 않다. 이곳 저곳에서 생명을 찾아 모여든 사람들. 그를 더 빨리 만나고 싶다.

속으론 이미 결론을 내고 있었다. 지난 8일 분당 한신교회(담임 이윤재 목사)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한신교회가 주최하는 제24회 전국목회자세미나에 그가 강사로 나섰다-관련기사 클릭), 약 1천명의 목회자들을 앞에 두고 그는 사력을 쏟고 있었다. 회개와 찬양이 하나가 되고 웃음과 울음이 다르지 않았던 이 한 번의 강의에서 기자는 8년을 압축했다. 그 성장의 비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물어와 이 목사조차 짜증이 날 정도였다던 그 질문의 답은 이찬수 목사, 바로 그 자신이 아닐지.

우선, 그는 솔직하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감추지 않는다. 많은 목회자들의 수많은 강의, 그보다 더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주일날 예배드리기가 귀찮더라” “설교를 잘 하는 것처럼 보여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정확히는 그처럼 진심이 느껴지는 말은 처음이라는 거다.

“거룩의 상징처럼 행동하다 결국 상처를 주고 실망을 주던 목회자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건 성경적이지 않다 생각했어요. 질그릇에 담긴 보물이 소중한 것이지 그릇 자체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죠. 지도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주 완벽하거나 아주 솔직하거나. 완벽하면 좋겠지만, 사실 전 그렇지 못하니까 솔직해지려 노력하는 것이죠. 알고 보면 굉장히 쉬운 일이에요.”

솔직함이란 정직함이고 이는 사람에게나 하나님에게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하나님께 정직하기가 더 어려울지 모른다. 이 목사의 정직함. 그 진짜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교회 와서 예배가 회복됐다면서요. 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립니까. 예배가 회복됐는데 왜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나요.”



이 목사를 만나러 가기 전 들어본 주일 설교에서 그는 교인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목에는 힘줄이 섰고 눈은 매서웠다. 그가 다시 말을 잇는다.

“성경 많이 봤다고, 기도 많이 했다고, 봉사 많이 했다고 자랑하지 마세요. 그런 거 많이 했는데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오히려 부끄러워해야죠. 차라리 성경 안 읽고 기도 안 했다 하는 게 나아요. 그런 사람에겐 희망이라도 있지.”

하나님께 정직하지 않고선 쉽게 할 수 없는 설교다. ‘하나님이 하라 하신 말씀 그대로 전했습니다’라는 고백. 그 누가 쉽게 하겠는가. 그리고 이 하나님을 향한 정직함은, 태양을 향한 식물이 필연적으로 열매를 맺듯 그렇게 교인들을 향한 사랑을 잉태했다.

“사랑이요? 거창한 설명보다, 그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 아닐까요. 목사에게 선한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건 약한 교인들을 섬기는 게 아닐까. 이렇게 선한 일을 사모하는 마음의 자세…, 그래서 사랑은 명사가 아닌 동사겠죠.”

그래서 이 목사는 늘 기도한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자신만의 골방으로 향한다. 이 때부터 오전 8시까지, 그는 홀로 하나님 앞에 선다. 이 시간, 이 목사가 목사에서 죄 많은 인간이 되는 순간이다. 혹 내 말이 교인들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는지, 인간적 생각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합리화해 욕심을 채우진 않았는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가르침을 전하진 않았는지…. 혹 그랬다면 상처받은 자를 치유하시고, 어리석은 목사의 욕심을 선한 욕심으로 바꾸시며, 하나님의 뜻만을 전하는 지혜로운 인도자가 되게 해달라고 이 목사는 매일 새벽 그렇게 무릎을 꿇는다.

그의 관심은 비단 그가 목회하는 교인들에만 있지 않다. 점점 활력을 잃고 세상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한국교회가 그는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서 “교회 좀 크다고 목에 힘들어가고……. 누구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사람 인생이 불쌍해서”라는 말이나 “교회 안에서 너무 쇼를 많이 한다” “교회가 모양새, 몇 명 모이느냐 이런 행위적인 걸 중요하게 여긴다”와 같은 말들도 서슴 없이 한다.

처음엔 젊은 목사의 혈기어린 치기쯤으로 여겼다. ‘나는 이렇게 똑바로 하는데 왜 너는 그렇게 하는가’라는 말투로 들려서다. 한국교회를 향해 이 목사처럼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은 사실 많다. 그런 사람 하나쯤 더 는다고 해서 정말 교회가 바뀔 것 같진 않다. 이 목사의 그것이 그저 의미없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거나 ‘허공의 외침’이라면 차라리 묵묵히 목회에만 전념하는게 더 낫다.

“우려하고 비판도 하지만 그 바탕에 교회를 보는 낙관적인 태도가 없다면 저 역시 입을 다물어야죠.”

그는 비판의 전제 조건이 되는 애정, 책임감 등 교과서적인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에게 애정이나 책임감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 ‘낙관적’이라는 말에는 그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다. 거꾸로 생각하면 쉽다. 저 사람은 결국 잘 될 것이라는 낙관이 결여된 훈계와 비판에선 그 어떤 애정도, 책임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픈 지적을 하고 또 해야 할 이유는 교회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비록 신체 장애를 가졌지만 세계적인 물리학자입니다. 그의 비상한 머리 때문에 아무도 그를 비참히 여기지 않아요. 예수님이 머리라면 교회는 몸입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어도 머리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교회에는 여전히 소망이 있어요.”

목회자였던 아버지는 내게 매우 귀감이 되셨던 분
영원의 시간 속에서 그의 기도가 내 사역의 열매로


이 목사를 말하면서 그의 아버지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목사는 “나는 문제가 닥치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가는데 아버지는 항상 하나님께 구하셨다. 내겐 굉장히 귀감이 되는 분”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한평생 작은 교회를 목회하셨던 이 목사의 아버지는 40일 금식 기도를 하다 그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당시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이 목사의 아버지는 하나님께 이 문제의 해결을 구하는 중이었다. 아버지의 소천이 이 목사에게 슬프고 또 슬픈 이유다.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이 공연자들을 격려하는 커튼콜이라는 게 있습니다. 한 번은 객석에서 예수님이 박수를 치고 있는 환상을 보았어요. 환하게 웃으시며 박수를 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이미 돌아가셨는데,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박수를 받아야 무슨 소용인가. 예수님께서 좀 더 일찍,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그를 위해 박수를 쳐주실 순 없으셨나. 이 목사에게도 원망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영원의 시간, 인간은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시간을 깨달은 후 이 목사는 또 다른 세계에 눈을 떴다.

“인간의 시각에선 아버지와 나, 나와 아버지의 시간은 끊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의 눈엔 이 것조차 영원을 잇는 하나의 순간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아버지의 기도는 끊어져 없어진 것이 아니라 제게 다시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사랑의교회에서 청소년 사역을 할 때, 재적 1,300여명에 교사만 2백여명이었어요. 신기하게도 제게 대드는 아이들이 한 명도 없었죠. 그것 뿐입니까. 여기 분당우리교회엔 온갖 사람들이 다 나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어요. 제가 누리는 모든 열매는 다 어버지의 기도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아무리 그에게 “설교를 잘 한다”고 해도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기자조차 그의 설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을 잡아끄는 말투와 귀에 술술 감기는 말의 억양, 분위기를 타고 자연스레 흐르는 위트에 전혀 어색하지 않은 진지함의 결합…. 분명 특별한 것이 있다.

“아마 믿지 않을 거에요. 정말 믿지 않을텐데…. 제가 설교한 걸 한 번도 끝까지 들어본 적이 없어요. 너무 민망해서요. 안 믿겠지만, 정말 설교를 못해요. 그런데 주변에서 하도 설교를 잘 한다 잘 한다 하니까 생각하는 거죠. 아, 내가 ‘아’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어’라고 들르게 하시는구나.(웃음)”

따라 웃었다.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가 웃으니 나도 웃었다. 정말 한 번도 자신이 설교 잘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까. 아마 그랬겠지. 이 목사라면 그랬을 것 같다. 그래서 기자도 그를 따라 웃은 것을.

머리보다는 가슴을, 눈에 보이는 것 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떠올리는 그가 신앙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앙이라는 것이…,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인데 하나님과 무관했던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우리와는 격이 다르신 분이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는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받아들이듯 그렇게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믿어져서가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는 것. 이게 신앙이 아닐까요.”

그리곤 긴 숨을 내쉬고, 따뜻한 웃음을 웃는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소망을 하나 물었다.

“세 아이의 아버진데…, 아이들이 아버지가 목사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제 작은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