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이론과 사회가 인간을 만들어 간다는 논쟁은 끝없이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사실 시대에 따라 어떤 이론이 더 강하게 영향을 줄 수는 있으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역사는 흘러가고 있다. 나는 커서 의사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졌으나 6.25 전쟁은 그 꿈을 송두리채 뽑아가고 다른 길로 가게 만들었다. 나만이 아니다. 단체나 국가도 전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가는일이 너무도 많다.
6.25 사변; 우리 가족은 전쟁으로 너무도 많은 것을 잃었다. 작은 집이지만 집이 평양에 있었다. 그 집을 마련하느라 부모님들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곳은 남녀 다섯 형제들의 보금자리였으나 전쟁은 그 집을 송두리채 앗아갔다. 뿐만 아니다. 내가 집을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자 오늘이나 혹시 내일이나 돌아오기를 염원하며 물을 떠놓고 빌기를 3년 이상을 했다고 한다. 더욱 바로 밑의 남동생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집 앞에서 즉사했고 옆에 계시던 삼촌도 같은 참변을 당했다. 부모님은 아들 둘을 잃고 큰 보따리를 이고 지고 어린 세 딸을 데리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 대전의 피난민 수용소에 들어가서 가마니 몇 장으로 바람을 막고 비를 피하며 여러 해 사셨다는 슬픈 이야기를 후에 들었다.
6.25가 터지던 날부터 계속 반복되는 평양의 뉴스는 남쪽의 괴뢰군이 북침을 해서 용감한 인민군은 반격에 나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대전을 지나 낙동강에 이르렀고 곧 부산이 떨어진다는 말을 했다. 나는 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우선 공산당들의 말은 진실성이 없고 또 남쪽에는 든든한 국방군이 있고 미국이 있는데 쉽게 무너진다는 말은 빨갱이 들의 수작으로 생각됐다.
내가 7월 9일 주일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정보원에게 끌려 간 곳이 평양 역이었다. 그곳에서 화물차에 실려 낮에는 미군의 폭격을 피해 굴속에 숨었다가 밤에만 가기를 3일간, 결국 도착한 곳은 원산 근처에 있는 덕원이었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창문도 없는 화물차에서 대소변을 보며 살아 남았다. 그 곳에 도착한 수백명이 배당 받은 것은 인민군 군복 그리고 2개의 수류탄과 소련제 소총이었다. 나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공산당의 군인으로 강제로 끼어 들어가 있었다. 그곳에서도 예수 자랑하다가 소대장에게 끌려가 권총을 이마에 대고 쏘아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으면서도 안 죽고 은혜로 살아남았다. 그 해 10월 중순에 우리의 부대는 중국으로 후퇴 하게 되었다. 떠나기 전날 밤 한 민가에서 식사를 하다가 몇방의 총소리에 장교들과 공산단원들은 어디로 도망가고 졸병만 몇명 남은 것을 알기는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으면서였다. 어수륵하고 동작이 느린 나 같은 친구들 중에서 몇 사람은 인민군 겨울 옷을 주고 민간인 옷을 바꿔 입고 산에 몇일 숨어 있다가 입성하는 국군에게 귀순했다.
포로 생활; 전쟁은 새로운 방향으로 갔다. 엄청난 중공군의 침입으로 국군과 미군들이 후퇴하게 되자 포로들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겼다. 후퇴하면서 데리고 가자니 힘들고 죽이자니 너무 많고 놓아주면 적군이 될 것이고.... 그 와중에 많은 포로들이 국군에게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그 희생자들은 모두 한 가정의 귀한 아들들이지만 전쟁속에서 귀천이 없이 파리 목숨처럼 명분없이 죽어갔다. 그 와중에서도 운이 좋아 살아남은 포로들은 미국 LST 배에 실려서 부산 근교에 와서 천막을 치고 가마니 깔고 담요 한장으로 살아야했다. 몇달 후에는 부산도 인민군의 공격을 받을 위험을 느낀 미군은 포로들을 남쪽에 있는 외딴 섬 거제도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 우익과 좌익의 싸움은 점점 가열되여서 잔인하게 죽이고 죽었다. 더욱 공산당원들은 기독교인들을 더 잔인하게 죽여 매장하거나 쓰레기 통에 넣어 강에 갔다 버렸다. 그 속에서도 나는 살아 남았을 뿐 아니라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했다.
전쟁에서 얻은 것;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평화주의자가 된 것이다. 또 있다. 생존의 존엄성이다. 살아있다는 그 자체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마치 미국의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쓴 '바람과 함께 살아지다'에 나오는 주인공이 그 무서운 전쟁 통에 너무도 배가 고파 남의 무밭에서 무 한자루를 뽑아 들고 외친다. "도둑질을 해서라도 살아야한다" 라는 생존의 절규다. 나도 6. 25 전쟁에서 생존의 의지가 강하게 다져저서 그 후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감당할수 있고 더욱 하루 하루를 기쁘게 살아가는 자세가 되었다. 6.25 전쟁으로 내 꿈도 형제도 고향도 친구도 잃었으나 얻은 것도 있다. 즉 환경이 나의 꿈과 목적을 송두리채 빼았아 갔을지라도 그 곳에서 오뚜기 처럼 다시 일어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멋지게 살아가는 오뚜기 삶이다.
6.25 사변; 우리 가족은 전쟁으로 너무도 많은 것을 잃었다. 작은 집이지만 집이 평양에 있었다. 그 집을 마련하느라 부모님들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곳은 남녀 다섯 형제들의 보금자리였으나 전쟁은 그 집을 송두리채 앗아갔다. 뿐만 아니다. 내가 집을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자 오늘이나 혹시 내일이나 돌아오기를 염원하며 물을 떠놓고 빌기를 3년 이상을 했다고 한다. 더욱 바로 밑의 남동생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집 앞에서 즉사했고 옆에 계시던 삼촌도 같은 참변을 당했다. 부모님은 아들 둘을 잃고 큰 보따리를 이고 지고 어린 세 딸을 데리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 대전의 피난민 수용소에 들어가서 가마니 몇 장으로 바람을 막고 비를 피하며 여러 해 사셨다는 슬픈 이야기를 후에 들었다.
6.25가 터지던 날부터 계속 반복되는 평양의 뉴스는 남쪽의 괴뢰군이 북침을 해서 용감한 인민군은 반격에 나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대전을 지나 낙동강에 이르렀고 곧 부산이 떨어진다는 말을 했다. 나는 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우선 공산당들의 말은 진실성이 없고 또 남쪽에는 든든한 국방군이 있고 미국이 있는데 쉽게 무너진다는 말은 빨갱이 들의 수작으로 생각됐다.
내가 7월 9일 주일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정보원에게 끌려 간 곳이 평양 역이었다. 그곳에서 화물차에 실려 낮에는 미군의 폭격을 피해 굴속에 숨었다가 밤에만 가기를 3일간, 결국 도착한 곳은 원산 근처에 있는 덕원이었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창문도 없는 화물차에서 대소변을 보며 살아 남았다. 그 곳에 도착한 수백명이 배당 받은 것은 인민군 군복 그리고 2개의 수류탄과 소련제 소총이었다. 나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공산당의 군인으로 강제로 끼어 들어가 있었다. 그곳에서도 예수 자랑하다가 소대장에게 끌려가 권총을 이마에 대고 쏘아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으면서도 안 죽고 은혜로 살아남았다. 그 해 10월 중순에 우리의 부대는 중국으로 후퇴 하게 되었다. 떠나기 전날 밤 한 민가에서 식사를 하다가 몇방의 총소리에 장교들과 공산단원들은 어디로 도망가고 졸병만 몇명 남은 것을 알기는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으면서였다. 어수륵하고 동작이 느린 나 같은 친구들 중에서 몇 사람은 인민군 겨울 옷을 주고 민간인 옷을 바꿔 입고 산에 몇일 숨어 있다가 입성하는 국군에게 귀순했다.
포로 생활; 전쟁은 새로운 방향으로 갔다. 엄청난 중공군의 침입으로 국군과 미군들이 후퇴하게 되자 포로들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겼다. 후퇴하면서 데리고 가자니 힘들고 죽이자니 너무 많고 놓아주면 적군이 될 것이고.... 그 와중에 많은 포로들이 국군에게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그 희생자들은 모두 한 가정의 귀한 아들들이지만 전쟁속에서 귀천이 없이 파리 목숨처럼 명분없이 죽어갔다. 그 와중에서도 운이 좋아 살아남은 포로들은 미국 LST 배에 실려서 부산 근교에 와서 천막을 치고 가마니 깔고 담요 한장으로 살아야했다. 몇달 후에는 부산도 인민군의 공격을 받을 위험을 느낀 미군은 포로들을 남쪽에 있는 외딴 섬 거제도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 우익과 좌익의 싸움은 점점 가열되여서 잔인하게 죽이고 죽었다. 더욱 공산당원들은 기독교인들을 더 잔인하게 죽여 매장하거나 쓰레기 통에 넣어 강에 갔다 버렸다. 그 속에서도 나는 살아 남았을 뿐 아니라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했다.
전쟁에서 얻은 것;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평화주의자가 된 것이다. 또 있다. 생존의 존엄성이다. 살아있다는 그 자체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마치 미국의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쓴 '바람과 함께 살아지다'에 나오는 주인공이 그 무서운 전쟁 통에 너무도 배가 고파 남의 무밭에서 무 한자루를 뽑아 들고 외친다. "도둑질을 해서라도 살아야한다" 라는 생존의 절규다. 나도 6. 25 전쟁에서 생존의 의지가 강하게 다져저서 그 후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감당할수 있고 더욱 하루 하루를 기쁘게 살아가는 자세가 되었다. 6.25 전쟁으로 내 꿈도 형제도 고향도 친구도 잃었으나 얻은 것도 있다. 즉 환경이 나의 꿈과 목적을 송두리채 빼았아 갔을지라도 그 곳에서 오뚜기 처럼 다시 일어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멋지게 살아가는 오뚜기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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