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역사상 첫 왕으로 세움을 입은 사울과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다윗을 마치 빛과 어둠의 차이처럼 확연하게 구분하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세움을 입는 은총을 입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사울의 쇠퇴와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축복을 경험하는 다윗의 모습을 대조해 보이므로 역사가는 후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강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그 두 사람을 통한 가르침도 귀하게 받음과 동시에 제게 커다란 삶의 가르침으로 다가오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사울의 아들이며 다윗의 절친인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과 자기가 사랑하는 친구인 다윗 사이에 빚어진 갈등으로 인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정의로 보면 친구인 다윗이 옳고 아버지가 그른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옳은대로만 행동할 수 없는 것은 그 옳지 않은 이가 바로 자기가 사랑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 편에 서서 친구와 대적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의로운 친구사이, 즉, 사랑과 정의사이에 그 갈등을 고스란히 안고 서있는 이가 바로 요나단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울(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두 번째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마가와 다시 동행할 것인가를 두고 크게 다투고, 급기야는 그로 인해 사울과 바나바는 결별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처음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니,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그까짓 사람 동행하는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해서 싸우고 헤어질까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 생각보다 더 깊은 가르침이 그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은 이 두 사람이 부딪친 문제가 바로 이 정의와 사랑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나서입니다. 두 사람의 첫 번째 전도여행에 동행했던 마가가 여행 도중 그만두고 돌아가게 되는데, 이로 인해 다시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이와같은 마가의 행동은 옳지 않기 때문에 동행하지 말자고 하는 바울과 마가의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의 입장이 맞서게 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바로 이 정의와 사랑의 도전 때문에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역사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10년도 더 지난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참 그렇습니다. 사건인즉, 우리 교회 은행구좌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적지 않은 금액이 지출된 것입니다. 사건 배후를 조사해 보니, 은행 구좌의 서명자가 교회 결정없이 변경되었고, 그 변경된 서명자에 의해 인출되었는데 그렇게 인출을 해 간 사람이 다름 아닌 우리 교회 옛 교우였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 교회가 통합할 때, 통합에 동참하지 않은 몇 사람들과 교회를 세우고 우리 연회에 개척교회로 가입을 했는데, 은행에 사용하는 교회 이름을 옛날 통합전 우리 교회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우리 교회가 그대로 존속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은행 구좌 서명자를 교회가 변경한 것처럼 거짓 증명을 해가지고 그것을 통해 구좌에서 인출해 간 것입니다. 이 황당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임원회가 거의 매 주일 모였는데 문제 해결방안에 대해 임원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이것은 사기이기 때문에 당장 사기 혐의로 고소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무리 옳지 않아도 교회가 그렇게 남을 고소하면 안되고 사랑으로 덮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사랑, 이것은 하나님의 두 속성으로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의해 뒤로 물릴 수 없는 소중한 신앙적 가치가 있기에 이 두 가지가 맞닿게 되면 언제나 선택은 또 다른 갈등을 빚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오랫동안 이 문제로 인해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행이도 감독님께서 양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결정해주셔서 문제가 해결이 되었지만 사랑과 정의가 맞대결하게 될 때 어느 한편을 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경험한 사건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조국이 이 갈등앞에 서 있습니다. 남북한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없지는 않지만, 어느 편이 옳으냐를 두고 판단하면 굳이 남한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북한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대부분입니다. 그러기에 정의의 잣대로 보면 북한의 옳지 않음은 응징되어야 마땅하다는 의견이 힘을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북한이 우리가 사랑해야하는 형제라는데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 어느 편에 설것인가... 오늘 우리 민족의 갈등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갈라졌던 이 사랑과 정의의 갈등앞에서 요나단의 결단이 그리워집니다. 아버지 사울과 친구 다윗, 사랑과 정의사이에서 갈등하던 요나단은 친구 다윗의 정의가 아버지 사울에 의해 눌리지 않도록 도와주고, 자신은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아버지와 함께 전장에서 죽습니다.

정의를 세우고, 사랑과 함께 죽은 요나단! 정의와 사랑의 갈등에서 어느 한편을 선택하라는 강압을 받는 우리가 바라보야 할 하나님의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