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았지만 그 어떤 사람보다 밝고 맑게 살다가 작년에 삶을 마친 고 장영희(전 서강대 교수)님의 유고작이 된 에세이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란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처럼 그의 삶은 살아온 자체가 기적이었고, 그래서 투병하면서도 앞으로도 기적으로 살아갈 날을 기다리며 쓴 글들을 모은 책인데 삶이 지루하다고 여겨질 적에 읽으면 새로운 도전과 감동을 찾게 해주는 글들이 담겨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책을 다시 읽다가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게 충격으로 다가온 글은 “너는 누구냐”라는 제목의 짧은 한편의 글인데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상략)
어떤 여자가 중병에 걸려 한동안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선을 방황하고 있는데 갑자가 몸이 위로 붕 뜨는 것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딱히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근엄하면서도 온화한 목소리만 들렸다.
“너는 누구냐?”
“저는 쿠퍼 부인입니다. 시장의 아내이지요”
“네 남편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목소리가 다시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제니와 피터의 어미입니다”
“네가 누구의 어미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선생입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너의 직업이 무어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목소리와 여자는 묻고 대답하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여자가 무슨 말을 하든지 목소리의 주인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너는 누구냐?”
다시 여자가 대답했다.
“저는 매일 교회에 다녔고 남편을 잘 내조했고,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나는 네가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네가 누구인지 물었다. 너는 누구냐?”
“.......”
결국 여자는 시험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시 이 세상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병이 나은 다음 그녀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하략)

제가 이 글을 읽다가 충격을 받은 것은 이 이야기 자체가 충격적이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우리가 어디에서나 그리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글입니다. 제가 충격을 받은 것은 이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장영희 교수가 밝힌 그녀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만약 자기가 이제 죽어 심판대에 서 있고, 누군가 자기에게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한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답할까? 나도 이야기속의 여자처럼 ‘나는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선생이고, 누구의 이모이고, 학생들을 가르쳤고, 등등’의 대답 말고 진정 내가 누구라고 답할 수 있을까?” 라고 자문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지금까지 누군가 말한 ‘명마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뛴다’고 한 말을 교훈삼아, 그렇게 자신도 ‘명마’가 되기 위해 이제껏 뒤 한번 안 돌아보고 좀 더 좋아 보이는 자리, 좀 더 편해 보이는 자리를 위해 질주했고, 숨 헐떡이며 지금의 이 자리까지 왔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오늘 들어온 우편물 봉투마다 인쇄된 수신자 주소에는 ‘장영희 교수’ ‘자문위원’ ‘이사’ ‘간사’ 등등 다양한 타이틀도 많지만 그 어느 것도 진짜 내가 누구인지 말해 주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온갖 타이틀만 더덕더덕 몸에 붙인 채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살고 있다”는 독백으로 글을 맺었습니다.

제게 충격은 그동안 기적 같은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기적처럼 살아갈 것을 말한 그녀이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그녀의 아쉬운 고백이었습니다. 장영희 교수가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도 그렇게 고백했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살아온 삶을 기적이라고 말할 만큼 다른 사람 같으면 한 번도 견디기 어려운 투병생활을 몇 차례 치르면서도 그렇게 맑고 밝은 글을 쓰며 당당하게 살아가므로 많은 이들에게 삶의 용기를 준 사람입니다. 죽음에 가까이 이르러서도 자신의 삶이 지금까지 기적으로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기적과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 옹골찬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 앞에 대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습니다.

아마도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가 차지한 자리를 자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 입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자기가 하는 일, 자기가 차지한 자리가 자기 자신인줄로 알고 사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너는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는가 봅니다.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질문에 “나는 누구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