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성장(成長)은 사람이나 동식물 따위가 자라서 점점 커짐이나 사물의 규모나 세력 따위가 점점 커짐을 의미한다. 반면에 성숙은 생물의 발육이 완전히 이루어짐 혹은 몸과 마음이 자라서 어른스럽게 됨이나 경험이나 습관을 쌓아 익숙해짐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장은 성숙과 비례하여야 건전한 성장을 이룰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장주의자들은 성장과 성숙을 한묶음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늘날의 나타나는 현상은 공동체나 개인이나를 막론하고 성장은 성숙과 반비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미성숙의 백화가 만발이다. 국가적으로도 성장주의가 성숙으로 마무리되지 않을 때 빚어지는 휴유증은 대단한 것이다. 한국에서 군사독재시절 이루어진 획기적인 경제성장이 성숙함으로 매듭짓지 못했을때 찾아온 국가적 변란이나 사회적 혼란을 수십년동안 겪어 왔음을 역사는 밝히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잘못된 성장론의 숙주(宿主)아래서는 필연코 유치한 결과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는 모든 공동체의 고민이며 지각있는자의 반성의 제목이다. 특히 기독교는 성장지상주의로 말미암는 사회적 책임에 대해 엄격한 채점을 피할 길이 없다. 성장은 양적 측량이 가능하고 성숙은 질적 측량이 가능함을 전제하여 할 수만 있다면 영적 성장과 성숙 게이지를 만들어 엄격한 평가를 하고 싶다. 일예로 한국 사랑의 교회가 대예배당을 건축하면서 벌이는 공방을 이 기계로 측정하면 어느 한쪽은 필연코 백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 -한쪽은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여왔고 앞으로 할 것이라 다짐하지만 한쪽은 이미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갔고 혹시나가 역시나 였다고 주장하니 하도 답답해서 해본 소리이다.-

어느 공동체 뿐아니라 개인에게서도 이 성장과 성숙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80노인이 되어도 지나간 때가 족하다 하지않고 폭력행사를 마다하지 않을 뿐아니라 다반사로 불량언사를 주저없이 내뱉는다면 이는 나이로는 성장했다 하겠으나 인격으로는 미성숙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생동하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그 성장이 성숙함을 목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공동체와 개인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육이 균형잡힌 성장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오직 한가지이다. 예수께서는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 그렇기에 그 분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공존으로 충만하였다. 이는 예수께서 성장과 성숙의 모델이 되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