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캘리포니아주 산호제 근방, 3월 하순, 봄이 한창이다. 원래 비가 적은 곳이지만 지난 몇 달 동안 많은 비가 내려 사막 같던 들과 초원 그리고 산은 마냥 푸르기만하다. 곤충과 짐승도 기지개를 켜고 그들의 본능인 번성을 위해 짝을 찾느라 한창이다. 움츠렸던 나무들은 연녹색의 새싹이 하루가 다르게 솟아오르고 장미는 한 두 주 사이에 붉은 가지에 꽃망울을 맺기 시작했다. 다른 여러 가지 꽃들도 봄 냄새를 맡으며 제 세상을 만난듯이 꽃봉우리를 크게 부풀린다. 새들도 물이 오른 가지에 앉아 청아한 목소리로 솔로를 하다가는 다른 새들과 멋진 합창을 한다. 풀 꽃 나무 짐승 새 모두가 봄 맞이에 한창이다. 그러나 이 곳 사람들은 봄에 대한 설레임이나 흥분을 별로 찾지 못 하는것 같다. 이유는 살을 베듯 추운 겨울이 없이 일년 내내 봄날 같아 어디를 가나 정원이나 길 가에서 꽃을 볼 수 있기에 특별히 봄을 의식 하지 않는것 같다. 마치 부잣집 애들이 고급 음식집에 가도 별 반응이 없듯이.
필자는 혹독한 겨울이 긴 시카고에서 오래 살았다. 자동차가 안 보일 정도로 눈이 덮이는 곳, 강한 바람이 어린애를 호수에 밀어 넣는다는 곳. 자주 학교가 눈 때문에 문을 닫는다. 모든 비지니스가 올 스탑이다. 눈을 치우다 허리를 다치거나 어름판에 넘어져 갈비뼈 부러지는 일은 흔히 있고 뇌를 다쳐 일생 불구자가 되는 일이 해마다 여러 건 있다. 그러기에 봄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또한 봄을 맞이하는 마음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웃에 은퇴한 스미스 씨는 봄이 오면 할일이 있든 없든 밖에서 산다. 걷고 뛰고 산책하고 등산하고. 겨울동안 집에서 하지 못한 운동을 배로 하며 우울했던 기분을 짧은 봄에 마음껏 푼다.
필자는 또 다른 봄을 늘 마음에 안고 산다. 감수성이 예민한 10대에 살았던 황해도의 초가삼간, 20여채가 모여 사는 깡촌의 봄이다. 전기도 병원도 학교도 파출소도 없다. 그러나 그 곳에는 하늘이 주는 춘하추동이 확실히 있었다. 약 3개월의 봄은 예년과 같이 찾아오는것이다. 또 있다. 인정이다. 남에게 빼았기고 내 것이라고 말을 못하면서도 내것이 있으면 나누어 주는 인심이 좋은 곳이었다. 필자는 미국시민으로 그곳을 떠난지 40여년만에 설레는 가슴을 안고 그 곳을 찾아갔다. 그러나 너무도 실망했다. 반세기가 흘러 한국을 비롯해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하고 있는데 그 곳은 40여년 전과 다를바 없이 가난과 굶주림을 그대로 안고 살고 있었다. 이 모습은 고향을 찾아간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했다.
그러나 그 곳 봄의 기억은 나에게 일평생 같이 가는 아름다운 동반자인것은 틀림이 없다. 따뜻한 봄 바람이 불어오면 땅에서는 화답이라도 하듯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실낫 같은 개울에는 눈 녹은 물이 잔잔한 소리를 졸졸 내며 흐르고 개나리 진달래가 활짝 핀 언덕 그 위에는 종달새가 높이 떠 지저귀며 강남 갔던 제비들은 돌아와 집을 짓기 한창이다. 아낙네들은 바구니를 옆에 끼고 언덕좌우에서 냉이를 캐는 한가로운 모습, 암탉이 새로 깐 병아리들을 데리고 구구구 하면서 먹이를 찾아주고, 되새김질을하며 반쯤 누워있는 소 옆에서 졸고 있는 강아지의 모습은 너무도 평화롭고 환상적이다. 가난하지만 그들은 봄을 만끽하며 오늘도 사는 것이 아닐까!
나는 어디가 제일 좋고 어디가 그 다음 이라고 순위를 매길수는 없다. 그 곳 나름의 장단점이 있고 그들 나름의 봄맞이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서는 부모를 따라 살고 어른이 되어서는 직장을 쫓아 살다보면 사는 그 곳에서 봄을 맞이하게 된다. 왜 사람들은 봄을 좋아할까? 이유는 봄이 주는 혜택이 많기 때문이다. 온화하고 따뜻하고 생명을 살리는 선물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온다는 약속을 한번도 어기거나 화 난다고 연기하는 법도 없이 그렇다고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흔히 믿었던 친구나 친지에게서 배신당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은 봄을 통하여 대신 기대치를 채우는 점도 있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온유하고 따뜻하게 나에게 대해주는 사람, 만날 때 마다 용기를 주고 격려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반대로 찬 바람이 부는 겨울 같은 사람은 가능한 피하고 싶다. 만날 때마다 상처를 받기에 다시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만나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한가지 묘안이 생겼다. 봄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리라. 어느 성인의 말 처럼 네가 원하는 만큼 네가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는 말씀이다. 봄이여, 영원하라.
필자는 혹독한 겨울이 긴 시카고에서 오래 살았다. 자동차가 안 보일 정도로 눈이 덮이는 곳, 강한 바람이 어린애를 호수에 밀어 넣는다는 곳. 자주 학교가 눈 때문에 문을 닫는다. 모든 비지니스가 올 스탑이다. 눈을 치우다 허리를 다치거나 어름판에 넘어져 갈비뼈 부러지는 일은 흔히 있고 뇌를 다쳐 일생 불구자가 되는 일이 해마다 여러 건 있다. 그러기에 봄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또한 봄을 맞이하는 마음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웃에 은퇴한 스미스 씨는 봄이 오면 할일이 있든 없든 밖에서 산다. 걷고 뛰고 산책하고 등산하고. 겨울동안 집에서 하지 못한 운동을 배로 하며 우울했던 기분을 짧은 봄에 마음껏 푼다.
필자는 또 다른 봄을 늘 마음에 안고 산다. 감수성이 예민한 10대에 살았던 황해도의 초가삼간, 20여채가 모여 사는 깡촌의 봄이다. 전기도 병원도 학교도 파출소도 없다. 그러나 그 곳에는 하늘이 주는 춘하추동이 확실히 있었다. 약 3개월의 봄은 예년과 같이 찾아오는것이다. 또 있다. 인정이다. 남에게 빼았기고 내 것이라고 말을 못하면서도 내것이 있으면 나누어 주는 인심이 좋은 곳이었다. 필자는 미국시민으로 그곳을 떠난지 40여년만에 설레는 가슴을 안고 그 곳을 찾아갔다. 그러나 너무도 실망했다. 반세기가 흘러 한국을 비롯해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하고 있는데 그 곳은 40여년 전과 다를바 없이 가난과 굶주림을 그대로 안고 살고 있었다. 이 모습은 고향을 찾아간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했다.
그러나 그 곳 봄의 기억은 나에게 일평생 같이 가는 아름다운 동반자인것은 틀림이 없다. 따뜻한 봄 바람이 불어오면 땅에서는 화답이라도 하듯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실낫 같은 개울에는 눈 녹은 물이 잔잔한 소리를 졸졸 내며 흐르고 개나리 진달래가 활짝 핀 언덕 그 위에는 종달새가 높이 떠 지저귀며 강남 갔던 제비들은 돌아와 집을 짓기 한창이다. 아낙네들은 바구니를 옆에 끼고 언덕좌우에서 냉이를 캐는 한가로운 모습, 암탉이 새로 깐 병아리들을 데리고 구구구 하면서 먹이를 찾아주고, 되새김질을하며 반쯤 누워있는 소 옆에서 졸고 있는 강아지의 모습은 너무도 평화롭고 환상적이다. 가난하지만 그들은 봄을 만끽하며 오늘도 사는 것이 아닐까!
나는 어디가 제일 좋고 어디가 그 다음 이라고 순위를 매길수는 없다. 그 곳 나름의 장단점이 있고 그들 나름의 봄맞이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서는 부모를 따라 살고 어른이 되어서는 직장을 쫓아 살다보면 사는 그 곳에서 봄을 맞이하게 된다. 왜 사람들은 봄을 좋아할까? 이유는 봄이 주는 혜택이 많기 때문이다. 온화하고 따뜻하고 생명을 살리는 선물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온다는 약속을 한번도 어기거나 화 난다고 연기하는 법도 없이 그렇다고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흔히 믿었던 친구나 친지에게서 배신당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은 봄을 통하여 대신 기대치를 채우는 점도 있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온유하고 따뜻하게 나에게 대해주는 사람, 만날 때 마다 용기를 주고 격려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반대로 찬 바람이 부는 겨울 같은 사람은 가능한 피하고 싶다. 만날 때마다 상처를 받기에 다시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만나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한가지 묘안이 생겼다. 봄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리라. 어느 성인의 말 처럼 네가 원하는 만큼 네가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는 말씀이다. 봄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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