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의 별세로 촉발된 무소유론이 신문 지상을 비롯한 온갖 매체를 연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와중에 기독교는 비교의 도마위에서 난도질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말과 글들이 사실에 입각한 판단이 아니라 편견과 왜곡된 말과 글로 비난 일색이다.

압권인 것은 소위 기독교매체이면서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다는 한 신문은 “무소유 불교 과소유 기독교”라는 제목을 뽑아 신랄하게 성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개혁을 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저주를 퍼붓는 것인지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사실에 입각하지 않는 촌평(寸評)은 촌평(村評)일 따름이다.

본 글의 중심은 형평성을 유지하자는 것이지 결코 타 종교를 폄훼할 의도가 없음을 전제하고 기독교의 경제관이나 물질관은 무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 무소유에 있음을 주장하고자 함이다. 사실 무소유는 오히려 쉬울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특정종교의 정체성에 비추어 볼때는 아주 당연한 일로서 결코 칭송을 받거나 모본으로 삼을 일이 아닌 것이다. 아니 세속을 떠나 출가했거나 가정을 꾸미지 않는 분들이 무소유로 지내는 것이야 상식적으로 볼때 지극히 당연지사의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한 두어 사람이 실천한 것이 큰 반향을 일으키는 아이러니를 연출하는 것이다.

물론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분들을 볼 때 존경과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몇 사람을 전체의 시금석으로 삼고 타 종교를 비난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기독교에도 무소유의 삶을 실천 한 분들은 부지기수이다. 장기려박사를 아는가? 따져보면 어떤 종교가 소유하고 있는 동산이나 부동산에 비하면 기독교의 소유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 과다한 소유 때문에 빚어지는 누추한 일들이 현재도 진행중에 있음을 만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사실 빈 손으로 온 인생들이 한 평생을 살면서 무엇인가를 소유하지 않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소유하되 그 소유를 자기 것으로 생각지않고 무소유자 처럼 지내는 일이 더 훌륭한 일이다. 그래서 날마다 버리는 삶을 실천했다는 그 분이 존경스러운 것이다. 아예 없는 사람이 무 소유의 삶을 실천했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인 까닭이다.

기독교는 소유하지만 두 벌옷을 가지지 않는 검약의 정신과 자신이 열심히 일한 것으로 이웃에게 내 것을 나누는 근로와 분배의 정신으로 실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소유의 기원을 분명히 하는 경제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얼음장 밑으로 눈 녹은 물이 흐르듯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실천하는 일들을 더 박차를 가하지 않기 때문에 쏟아지는 염려와 격려의 고언은 겸허하게 수용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