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부이치치는 1982년 호주 브리즈번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테트라-아멜리아병'을 지니고 있었기에 팔 다리가 없는 기형아였던 것이다. 그들의 부모조차 기겁하여 몇 달동안 대면하려고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와 같은 희귀병을 갖고 태여난 오체불만족의 오도다케 히로다테의 어머니가 ‘아이구 귀여운 내 새끼!’라고 첫 탄성을 질렀다는 것보다는 매우 인간적 반응이었던 것이다.

닉 부이지치는 비교적 8살이란 늦은 나이에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몇 번의 자실시도를 하였지만 그때마다 실패하였다. 그가 중증 장애를 극복한데는 그의 부모와 형제의 헌신적인 노력이 뒤따랐다. 그의 아버지는 청소년기 좌절하던 그에게 "닉, 괜찮아. 네가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해"라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한결같은 애정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그를 장애인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 보내 비장애인들과 함께 어울리도록 강하게 키웠으며, 울면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그를 인내심을 갖고 지켜봤다는 것이다.

그후 호주 그리피스대에서 회계학과 재무학을 전공 졸업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비영리단체 '사지 없는 삶(Life without Limbs)'을 만들고 4개 대륙 12개국 이상을 다니며 희망을 전하고 있다. 그는 수영과 골프, 농구를 즐기고 줄넘기도 한다니, 사지가 멀쩡한체 무위도식하는 인생들에게는 부끄러움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잘생긴 얼굴로 무개차를 타고 지나면 관심을 보이는 여성들이 많은데 가까이 와서 팔다리가 없는 것을 보면 천리만리 달아날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죠크를 아끼지 않는 그는 인생 대반전을 이룬 행복전도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사(人間事)에는 이런 일들이 적지 않게 있어 왔다. 모차르트가 다시 살아온 것 같다는 찬사를 들었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1차 대전에 참전했다 부상당해 오른손을 잘라내야 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생은 끝장났던 것이다. 그는 10여 년 동안 방황했지만 운명에 굴복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작곡가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위해서 왼손만으로 칠 수 있는 피아노곡을 작곡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청에 응해 왼손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곡을 작곡해준 이는 저 유명한 ‘모리스 라벨’이었다.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D장조’가 바로 그 곡이다. 이 연주가 성공하자 그 이후로 많은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왼손만을 위한 곡들을 만들어주었고 두 손이 다 있는 연주가들도 왼손만으로 그 곡들을 연주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게끔 됐던 것이다. 한 손만으로 연주하는 피아노곡이 무려 1천 곡이나 된다고 하니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또한 피아니스트 리온 플라이셔(Leon Fleisher)는 여덟 살 때 연주회를 가졌던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였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 뉴욕 필과 협연했고 열일곱 살 때 카네기 홀에서 독주회를 가졌을 정도로 앞날이 창창했던 그에게 30대 초반에 짙은 구름이 드리워졌는데 오른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결국 서른여섯 살에 음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도 비트겐슈타인처럼 오른손의 장애를 극복하고 지휘자로 컴백했을뿐아니라 피아노 교수로 활동했다. 그리고 발전된 의학의 도움을 받아 1995년에는 드디어 오른손으로도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낸 음반이 <두 손 Two Hands>이란 제목의 음반이다.

닉 부이지치나 파울 비트겐슈타인, 리온 플라이셔는 장애를 극복하고 인생반전을 이룬 자들인 동시에 육체의 장애속나 마음의 장애를 가진 모든 자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소망의 전도사들이다.